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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충구

바이든 취임 연설에서 느낀 것

솔직히 말해 나는 우리 주변 정치가들에게서 인격이나 품격을 느끼기는커녕 온갖 저급한 언설이나 마음에도 없는 상투적인 언동에 식상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이리저리 알게 된 몇몇 정치인들을 향해서도 내심 인격적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품지 못하고 살아왔다.

하지만 바이든의 취임 연설을 들으면서 우리 정치가들과는 달리 그가 매우 종교적이며, 도덕적이고, 정신적 가치를 존중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개인적인 느낌은 마치 진솔한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것 같았다.

시간이 많지 않아 자기 전에 그의 연설을 다시 들으면서 내가 느낀 것을 최대한 그의 언어에 가깝게 정리해 보았다.

1. 바이든은 거의 평생을 정치가로 살아온 사람이지만 그는 품격을 지켜온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설 내내 미국을 분열시키고 떠난 트럼프의 처신을 언급하면서도 그는 사적 감정에 사로잡혀 트럼프를 향한 비열한 언어적 공격을 하지 않았다.

2. 바이든은 연설을 통하여 매우 명료하게 트럼프와 자신이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결과적으로 트럼프가 의존하던 정치 세력을 향해서 그가 굿바이를 선언한 셈이다. 그는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 정치적 극단주의,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차별주의, 자국민에 의한 폭력이나 테러를 청산하겠다는 명료한 의지를 밝혔다.

3. 바이든은 흑인 대통령 오바마의 파트너로서 부통령직을 수행했고, 그가 대통령으로 출마하면서 쟈마이카-인도 혈통을 가진 흑인 여성인 해리스를 부통령으로 지명하여 인종차별주의를 정면 해소하였다. 그는 평등과 상호 존중, 품위의 가치를 소중히 여긴다는 입장을 보이면서 자기에게 “변화시킬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아 달라”고 선언했다.

4. 바이든은 선조들이 꿈꾸던 과제들을 더는 미루어 두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민주주의는 이견을 용납하고 허용하는 정치를 지지하지만, 그 이견이 곧 대립과 폭력을 불러오거나 거짓된 정보에 의하여 조작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자기 소신을 분명히 밝혔다. 민주주의 장점을 다양성의 예찬에서 볼 수 있지만, 정보가 조작되거나 거짓을 주장하는 것까지 용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5. 신실한 가톨릭 신자인 바이든은 민주사회의 기본 상식을 존중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미국의 가치를 기회, 안전, 자유, 존엄성, 존중, 명예, 그리고 진실을 옹호하는 데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정치 지도자로서 미국을 지킨다는 것은 미국 헌법을 귀히 여기고 지킴으로서 국가를 지키는 것이며, 동시에 진실을 지키고 거짓을 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6. 바이든은 정치가로서 흑백의 논리나 진보나 보수로 나뉘어 파당적 싸움을 하는 미개한 전쟁(uncivil war)에서 벗어나 우리가 모두 상대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는 태도를 견지한다면 관용과 겸손을 보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대외 정책에서도 미국이 권력을 과시하는 나라가 아니라, 좋은 모범의 능력을 갖춘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7. 바이든은 자신은 미국을 지킬 것이며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국민 모두를 섬기는 데 쓰겠노라고 약속했다. 자신의 개인적 이득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공의 선을 위해 일하겠다는 것이다. 두려움보다는 희망을, 분열보다는 단합을, 어둠보다는 빛을 선택하자고 호소하면서 그는 품위와 인간다운 존엄성을 지키고, 동시에 사랑과 치유의 힘을 믿으며, 위대함만이 아니라 선함을 지닌 역사를 창조해 나가자고 요구했다.

8. 바이든은 마지막으로 민주주의와 희망, 진리와 정의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안으로는 국내 모든 이들의 자유를 지키고, 밖으로는 미국이 하나의 등대처럼 빛을 발하는 나라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는 "믿음에 힘입어, 확신에 이끌려 우리가 서로를 향해, 그리고 우리가 모두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 나라를 향하여 헌신한다면 이 어려운 시대에 우리에게 맡겨진 역사적 과제를 잘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이라며 취임 연설을 매듭 지었다. 그는 믿음과 확신과 헌신을 미국민에게 요구한 셈이다.

바이든의 연설이 결국 행간마다 트럼프의 행적과 묘하게 대조되어, 트럼프가 얼마나 잘못되고, 부도덕하며, 그릇된 생각의 사람이었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그는 지난 4년간 미국과 세계를 얼마나 어지럽게 했던가? 바이든 행정부가 미국이 지닌 제국주의적 속성을 얼마나 극복하고 보다 나은 한 줄기 빛을 세계에 비추게 될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미국민은 트럼프보다 훨씬 정직하고, 품위가 있고, 신념이 있는 대통령을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광신

1.

코로나 바이러스에 확진된 이들이 하루 천 명을 넘나드는 시제로 인하여 온 국민이 깊이 근심하고 있는 정황인데 보수 성향의 목사들이 집단으로 모여 정부를 위협하며 대면 예배를 허락하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다. 끼리끼리 모인다고 했던가? 광기에 사로잡힌 목사들이 이성을 잃은 것 같다. 반사회적인 짓을 해도 집단으로 모이면 정부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성경을 제정신으로 읽고, 깊은 영성적 묵상의 시간을 가지며, 신학적 사유를 하는 목사라면 저런 짓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바로 얼마 전 감리교 서울연회 감독이 마치 기독교가 예배에 목숨을 건 종교인 양 대면 예배 실시를 선언하며 선동을 하더니 이번에는 부산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건전한 상식과 사회 상규에서 벗어난 짓을 벌이면서 이들은 방역을 위하여 일시적으로 대면 예배를 못 보게 하는 정부를 일러 “반-기독교적” 정권이라며 비난을 던지고 있다.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지키고, 사랑과 평화를 외쳐야 할 기독교가 정신이 나가 바이러스에 걸려 사람이 죽어도 좋으니 예배를 드리게 해달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니 오히려 반기독교적인 종교로 전락한 듯하다.

2.

성경에는 오늘날 절대 따라 하면 안 되는 일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성경의 맥락에서 보면 모두 영웅적으로 잘한 것처럼 평가되고 있다. 출애굽 했던 고대 이스라엘 족속이 남이 대대로 사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땅을 빼앗으면서도, 적반하장 못된 짓을 한 장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고대 이스라엘 족속들의 영웅적 인물인 모세는 이렇게 외쳤다. 민수기 31장 17~18절이다.

" 그러니 이제 아이들 가운데 남자는 다 죽이시오. 남자와 동침하여 사내를 안 일이 있는 여자는 다 죽이시오. 여자들 가운데서 남자와 동침하지 않아 사내를 안 일이 없는 처녀는 당신들이 차지할 몫으로 살려 두시오. “

무슨 소리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남자는 닥치는 대로 모두 죽이고, 유부녀도 죽이고 오직 숫처녀들만 살려두라는 말이다. 처녀들을 살려두라는 이유는 너희 좋을 대로 하라는 소리다. 집단 강간하라는 소리다. 이런 무시무시한 지령을 내린 이가 바로 이스라엘 족속들이 영웅처럼 여기던 모세다. 이런 모세의 무자비한 가르침이 과연 하나님의 뜻이었을까?

성경에 쓰여 있다고 하여 모두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치거나 믿는 이들은 조금은 정신이 나간 사람이다. 생각해 보라, 숫처녀들만 남기고 모두 죽이라니... 남기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전쟁터에서 전리품을 나누어 가지듯이 전사들이 적의 딸들을 강간해도 좋다는 뜻이다. 천하에 고약한 야만적인 지시가 어떻게 하나님의 종이라는 자의 입에서 그리 쉽게 나올 수 있었을까?

이런 전통은 인간의 소중함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던 야만과 혐오의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적이라면 남자는 다 죽이고, 적의 여자를 전사들의 성욕을 충족시키는 도구나 종으로 삼았던 고대 사회의 풍습이 성경에도 담겨 있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소리를 성경이 아닌 옛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시대에 빈번했던 전쟁사에도 적을 잔인하게 모조리 도말하라는 주장이 담겨있다. 트로이 전쟁은, (신화적인 이야기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지만) 이웃 나라 왕자의 아내 헬렌과 눈이 맞아 그녀를 왕궁에서 빼내 함께 도망쳤던 트로이 왕자 파리스(Paris)의 무책임하고 비겁한 행동으로 인하여 일어난 전쟁이었다. 이 잔혹한 전쟁에 대하여 호머는 그의 서사 시집 오디세이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한 트로이 병사가 스파르타 왕 아가멤논에게 그저 목숨만 살려 달라고 간청하자, 아가멤논은 차가운 눈초리로 그 병사를 쏘아보며 이렇게 선언한다.

" 아니다. 우리는 그들 중의 한 사람도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어미의 태에 있는 어린 생명까지 그 어느 사람도 살아남지 못한다. 그 종족 전체는 흔적도 없이 도말 되어 누구도 그들을 기억하며 눈물을 흘리지 못할 것이다."

모세가 가나안 족속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했던 그 무자비한 명령과 같은 소리다. 그리스인들이 여호와 신앙의 아버지 격인 히브리인 모세에게 배운 것일까? 아니면 모세가 그리스 야만 문화에서 배워온 것일까? 도대체 하나님의 뜻은 여기서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나?

3.

모세의 말이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이 구절을 영적으로 해석한다고 나서는 목사들도 있다. 동시에 목사가 원하는 대로 정부가 따라주지 않는다고 하여 자기 나라 정부를 향하여 저주를 선언하고 하나님의 적대자라고 비난을 쏟아 내는 멍청한 목사 무리도 있다. 모세에게 못된 것을 배운 모양이다. 인문학적 소양이 없는 무식한 목사다.

신학적 사유를 결핍한 무식한 목사들이 모여서 한다는 짓이 오늘의 민주화된 시대를 살면서 마치 옛 고대 이스라엘 야만 족속들이 그들의 시대에서 하던 야만적인 짓을 따라 하려는 것이다. 이런 자들이 생각하는 영웅적 지도자는 자기 나라 정부를 마치 가나안 족속인 양 업신여기는 자다. 모세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르친 것이 야만과 증오가 아니고 무엇이었나?

모세는 이 시대의 영웅이 되기에는 많이 모자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편협하기 짝이 없는 자가 아닌가? 그가 종족 우월주의에 빠져 광기를 부리던 것이 그렇게 멋있어 보이는 것일까? 그때나 지금이나 편협한 신앙을 가지면 광기에 사로잡힌 무서운 인간이 된다. 부산 세계로 교회 목사와 그 추종자들의 모습에서 나는 이런 광기가 번지고 있는 것을 본다.

4.

성경에는 하나님 신앙을 빙자해 광기를 조장하는 구절이 상당수 있다. 문자 그대로, 성경대로 살면 기독교 신자는 살인자가 되어야 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됨을 지키기 위해서 돌로 쳐 죽이거나 사형을 시켜 죽여야 할 자들이 28종류나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혹시 혼전, 혹은 혼외 관계를 맺은 자라면 반드시 죽여야 할 대상이다. 다른 법은 적용하지 않고 오직 동성애자만을 죽이라는 구절만 레코드판처럼 주절거리는 자도 죽임을 면치 못한다. 전 모 목사 같이 거짓된 예언을 하는 자도 죽여야 한다. 하나님 외 다른 신앙을 가진 이교도들도 다 죽여야 한다. 심지어 부모를 거역하는 자식도 죽여야 한다. 왜 죽여야 한다고 했을까? 순수한 신앙,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공동체가 불순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란다.

그러므로 순수를 주장하거나, 믿음이 좋다는 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신학도 모르면서 성경대로, 믿음으로 살겠다고? 그렇다면 아주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목사는 제대로 된 신학대학에 가서, 제대로 된 신학 훈련을 받아야 하고, 성서에 대한 비평 능력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중구난방 난립한 신학교가 전국에 수백 개가 있다. 크고 작은 교회 수보다 세 배나 더 많은 목사가 우글거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목사 중에는 제대로 된 대학에 갈 정도의 수학능력이 없어서 제대로 된 교수에게 신학 훈련을 받지 못한 자들이 부지기수다. 이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신자를 모아 조금 큰 교회를 이루면 기고만장하여 모세 시절에나 있음 직한 야만적인 기준을 신자들에게 제시하면서 다른 종교, 혹은 다른 전통, 자기와는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을 혐오하고 증오하도록 교사하고, 심지어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민주 사회의 공리를 무모하게 뒤집어 버리겠다고 달려든다.

성경에 보면 사사기 15장에 삼손이 당나귀 턱뼈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 일천 명을 때려죽였다는 기사가 나오고, 열왕기 상 18장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7백 명을 피를 튀겨가며 참살했다는 기사도 나온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승리주의에 취해 집단 최면에 걸린 장로, 권사, 집사들은 삼손이나 엘리야, 모세 같은 살인자를 신앙의 영웅으로 기리고 흠모하는 바보들이 된다.

우둔한 신자들은 살기와 광기가 가득한 삼손, 엘리야 같은 모습을 내면화하고 신앙의 모범으로 여기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신학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목사들은 영웅신화를 설교 주제로 삼기를 즐기면서 신자에게 비범한 신앙, 영웅적 신앙인을 닮으라고 가르친다. 하나님 신앙을 가지고 남을 증오하고 살인하는 자들이 그들의 모범이요 영웅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자연스럽게 덧붙여지는 것이 타 종교인에 대한 편견, 증오, 차별, 혐오만이 아니라 살의까지 품는 것이다. 이런 무리에게 끌려가면 그대는 신앙을 가지면 가질수록 혐오와 증오를 내뿜는 자가 되고, 심지어 살기를 품은 무서운 신자가 되는 것이다. 심약한 자들이 이런 집단에 빠져들면 자기 지성, 이성, 합리성을 모두 박탈당한다.

5.

상주 열방선교센터라는 곳에서 선교 훈련한답시고 가르치는 것은 비이성적이고, 부도덕하기 짝이 없는, 호전적이고도 야만적인 신앙이다. 야만적 신앙을 배우면 근거도 없는 영적 우월주의에 빠져 민주사회의 공리나, 법치주의나, 국가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이라면 함께 지켜야 할 공동선, 정부의 권위 등을 하찮게 여기거나 무시하게 된다.

신학 훈련이 잘못된 목사에게 걸리면 좋은 신앙을 가진다는 의미가 오히려 무시무시한 반사회적 신자가 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신천지 교인이나 열방 센터 교인이나, 모두 정신이 나가 광기에 사로잡힌 반사회적 신자의 작태를 보이는 이유다. 이들은 민주사회의 공리에 대한 이해,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에 대한 이해가 박약하고, 더욱 정의로운 사회 질서에 대한 책임에 대하여 기초 소양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의 영적 지도자의 지시만 있으면 무슨 짓이든지 하려 드는 것이다.

이들은 남의 종교를 존중하기는커녕 종교 시설에 무단 잠입하여 불을 지르거나 성물들을 훼손하기도 하고, 일방적인 폭력을 가하면서도 자기 신앙을 증거 했다고 자랑하기도 한다. 이들의 모범은 모세나, 삼손이나, 엘리야 같은 자다. 안하무인 살인자를 신앙의 영웅으로 삼는 어리석은 멍청이들이다.

이들은 동류들과 집단적 세뇌를 수시로 받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야만적 신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쉽게 깨닫지 못한다. 오히려 자신들이 남보다 나은, 매우 우월한 신앙을 가진 영웅적 신자가 되었다고 여긴다. 집단으로 이런 기이한 신앙을 교도 받으면 집단의 크기에 따라 그 비정상적인 신앙이 증폭 강화된다.

이런 이유로 사이비들은 거대 집단 집회를 자주 여는 것이다. 심약한 자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신앙에 의혹을 가지다가도 거대한 집단을 이루는 집회에 참여하게 되면 의혹이 확신이 서고, 비판 이성이 마비된 채 열광주의적인 신앙에 빠지게 된다. 나는 이런 상태를 “절반은 미친 것”이라고 본다.

6.

민주사회에서 국가 권력이 사이비 종교를 통제하기는 매우 어렵다. 민주 사회는 신앙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 민주사회의 공리인 신앙의 자유를 오직 자기 자신들에게만 적용하고 다른 이들에게는 적용하지 않겠다는 집단이 호전적인 보수 근본주의 집단이다.

이들은 자신들에게는 무한한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라고 요구한다. 동시에 모세 시절의 야만적인 이스라엘의 전쟁 풍습을 가르치고, 삼손이나 엘리야같이 상대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1도 생각할 줄 모르는 야만적 신앙 영웅을 모범으로 따르자며 종교 간의 갈등과 불화를 일으킨다. 이들은 민주사회가 부여한 자유를 가지고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이나 소수자를 핍박하고 괴롭히면서도 오히려 참 신앙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믿는 신자다.

이렇듯 한국 개신교 안에는 “신앙 우월주의”라는 집단 최면에 걸려 멍청한 짓을 해야 신앙심이 더 깊고 경건하다고 여기는 바보들이 적지 않다. 종교 집단이 크면 클수록 목사가 비정상적인 영웅주의를 가르쳐야 신자들이 열광한다. 심지어 깊은 밤 공동묘지를 배회하게 하고, 개처럼 대변을 먹게 하는 목사도 있었지 않은가.

7.

상주 열방 선교 센터에서 한 짓을 눈여겨보니 가히 국가 기관의 방역망을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조롱하고 기만해온 범죄 조직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의 안전을 지키기 위하여 방역 당국이 지난 일 년 동안 얼마나 희생적으로 고생을 해 왔는가? 지난 한 해 동안 방역 당국이 쳐놓은 방역망 때문에 무수한 생명이 보호받아 오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이런 현실을 아예 도외시하고 방역망을 무시하며 붕괴시키려 했던 이 집단은 어떤 사상을 가졌기에 이 모양이었을까? 일종의 반사회적 사이비 종교 집단의 성격을 가진 집단이 아니었을까? 민주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업신여기는 종교 집단은 사회 공동성만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삶에도 반사회적인 성향을 부추겨 사회 통합과 질서에 역행하는 무리로 전락 시켜 해악을 끼치게 된다.

이들은 자기들끼리의 연대와 공동성을 이루기 위하여 사회의 기본 질서를 짓밟는 일에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이들은 불법 집회를 열고, 참여자에게 상주 가까이 오면 핸드폰을 끄게 하여 방역 당국의 추적을 피하도록 교사했고, 심지어 귀갓길도 우회하도록 요구하여 방역 당국이 의심하지 못하게 했을 뿐만이 아니라, 어느 경우는 웹 등록 시스템의 허점을 이용하여 마치 집회 참석자들이 제주도를 다녀온 것처럼 속이기도 하는 등 온갖 부도덕한 수단을 동원했다.

범법적으로 방역 당국의 눈을 속여가면서 비밀 모임을 열던 행태가 드러나자 이번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가로막는 반 기독교 정부”라며 집단으로 모여 정부를 공격하고 있다. 이들은 왜 이런 짓을 감히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이들이 일반 교회 신도들과는 달리 상식에서 벗어난 영적 우월주의를 교사하고, 거듭난 자의 특별한 소명과 지위를 강조하는 데에서 잘 드러난다.

이들은 신자로 하여금 자신을 영혼 구원을 위한 세계 선교의 전진 기지에 속한 자로 여기면서, 일반인 수준이 아니라 특별한 영적 싸움을 싸우는 전사라는 의식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이렇게 되면 이들은 누군가가 자기 집단에 적대하면, 이내 그를 하나님의 적대 세력으로 등치하고 그 대상을 향하여 증오와 혐오를 뿜어내는 신자가 된다. 이들은 자기들의 요구를 받아주지 않는 정부를 너무나 쉽게 하나님을 적대하는 세력으로 규정하고 신도들에게 하나님만 택하라며 매우 잘못된 시민 불복종을 교사하는 것이다.

8.

이런 집단에 걸려들면 정부의 권위를 무시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을 마치 좋은 신앙인의 의무인 것처럼 여기는 사람이 되고, 정부가 공권력을 동원하여 그들을 제어하면 이내 핍박받는 순교자 코스프레를 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기독교 윤리학적으로는 민주주의와 하나님은 대립하거나 반목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신학적 명제를 이해할 능력이 없다. 이들은 오히려 하나님 신앙의 이름으로 방역법도, 사회질서도, 그리고 그들이 속해 있는 자기 나라 정부의 권위도 마구 무시할 수 있다고 배운 것이다.

이런 행태에 젖어 들면 이들은 민주사회 구성원이 합의한 법치 질서도 무시하거나 초월할 수 있다는 우월 의식과 예외주의를 유통하기 시작한다. 전광훈이 부류에서 우리가 목격했던바 허황한 영적 우월주의다. 전광훈이는 자기가 직접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이라고 너스레를 떨고, 마치 하나님의 권위를 옷 입은 것처럼 허세를 떨었다. 이런 종교적 허세나 과장은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이 멍청한 신자를 위협하기도 하고, 구슬리기도 하며, 맹종을 요구하는 수단이 된다.

사이비 목사들이 흔히 떠벌리는 방식, “어젯밤에” 혹은 “오늘 새벽에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라고 주장하며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음성”, “예수님의 말씀”이라며 주장하는 내용은 100% 거짓말이거나 지어낸 것이다. 이런 자들은 교활하게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에 권위를 더하기 위해 상습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빙자한다.

이런 자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성서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그 내용은 대부분 자신의 욕망이나 욕구를 하나님의 요구나 뜻으로 포장하여 신자들로부터 복종과 헌신을 받아내기 위한 것이다. 이런 기만적인 허세 앞에서 신학적 분별력이 없는 신자들은 앞다투어 물질과 시간, 심지어는 가족 관계까지 희생하면서 공개적인 경쟁 구조에 빠져들고, 그들 중에서 더욱 우월한 자가 되기 위하여 더 열광적인 신자로 변모해 간다.

이런 지경에 이르면 그들의 신앙생활은 사랑과 평화의 길이 아니라 광기에 사로잡혀 증오와 혐오를 뿜어내는 기이한 열광주의자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이런 신자들은 많은 것을 잃어버린 후에야 비로소 제정신을 차린다. 어리석은 신자가 되어 광신에 빠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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