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을 위한 전략·전술적 접근(4)_배신하지 않을 공수처장을 임명하려면...]
1단계: 우선 업무추진계획서(work plan, WP)를 검토해야 한다
공수처장 후보자에게 임기동안 어떤 이니셔티브(initiatives)를 어떤 원칙에 따라 어떻게 추진할 것인지에 관한 상세한 업무추진계획서(WP)를 제출받아 꼼꼼히 검토하고 이를 공개해야 한다.
공직자의 주된 업무내용을 공개하는 것은 당연하며 이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노동자들이 매년 2,000~2,400명씩 노동현장에서 죽어나가고 있는데도 저 빌어먹을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어디서 뭘 하고 자빠졌는지 아무도 모른다...ㅠ...)
2단계: 대통령은 지명된 후보자와 성과계약서(performance agreement, PA)를 통해 사회적 계약(social contract)을 맺어야 한다.
PA에는 WP에 나온 것을 특별한 이유 없이 실천하지 않는 경우에는 해임될 수 있다는 조문이 삽입되어야 한다.
✽ 내가 지속적으로 강조한 것인데, 모든 고위공직자는 국민과의 사회계약(social contract)을 맺어야 한다. 이런 WP와 PA를 작성해서 국민을 대리하는 대통령과 계약을 맺어야 하고, 이 PA는 일반에게 공개되어야 한다. (투명성과 공정성의 원칙)
✽ 윤석열을 임명하기 전에 이런 절차를 거쳤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패착이었다.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개혁을 위한 전략·전술적 접근(3)_옳고 그름의 기준을 일관되게 지속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어린 아이들이 망가지는 이유
부모가 제대로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 즉 진위와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일관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거짓말을 할 때는 반드시 야단쳐야 한다. 악한 행위에 대해서는 어떤 형식으로든 처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도록 해야 한다.
야단과 처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관성과 지속성이다. 부모의 기분이나 감정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면, 아이들이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을 기를 수 없으며, 오히려 옳고 그름의 기준을 헷갈려서 정신적으로 더 큰 혼란을 겪을 수 있다. 지금 판·검사들이 그 지경까지 왔다. 따라서 야단과 처벌은 어떤 경우에도 옳고 그름의 분명한 기준에 따라 행동할 때까지 일관성 있게 지속해야 한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아이의 버릇을 잘못 들이는 것은 부모다. 판·검사들의 부모역할을 하는 우리사회가 지금까지 기준과 원칙 없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처분했기 때문에 우리사회가 판·검사들로부터 그 업보를 받고 있는 것이다.
양육전문가들의 삐뚤어진 아이 행동수정 방법을 보면 아주 간단하다. 옳고 그름에 대한 일관된 기준으로 반복해서 훈련시킨다. 아이가 순식간에 달라진다.
인간은 환경조건을 통해 올바른 행동패턴을 습득한다
따라서 옳고 그름의 기준에 의한 야단과 처벌은 일관성과 지속성을 유지해야 한다. 어린아이들만 그래야 하는 게 아니다. 사회생활을 하는 성인들 또한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기업조직에는 윤리강령이나 행동규범 같은 것이 있다. 직무윤리규정 같은 것도 있고, 검사들이 하도 나쁜 짓을 많이 하니까 검사선서 같은 것도 만들었다. 좋은 말은 다 들어있다. 하지만 그것은 벽걸이일 뿐, 아무도 그것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 아무도 그 좋은 기준에 따라 일관되게 야단을 치거나 처벌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반드시 해야 할 행동〉과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몇 가지씩 정해서 실행해보았다. 그런데 이게 잘 지켜지지 않는다. 정해진 행동규범들이 왜 잘 지켜지지 않고 결국에는 흐지부지될까? 독일에서는 직장윤리가 잘 지켜지는데 왜 우리는 안 지켜질까?
그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인간의 도덕성과 윤리의식은 환경조건에 따라 성장해가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성장하는 환경조건을 생각해보라. 옳고 그름의 기준이 무엇인가? 시험성적과 돈이다. 우리는 이 기준으로 살아왔고 지금은 더욱 강화된 그 기준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우리사회를 그렇게 만들어온 것은 해방 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을 비롯한 독재자들 때문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미국식 자본주의 영향은 한국인의 정신구조를 시험성적과 돈으로 더욱 왜곡시켰다. 학교 다닐 때는 시험성적이 옳고 그름의 유일한 기준이 되었다가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 기준이 돈으로 바뀐다. 검찰과 법원의 악폐는 여기서 나온다.
돈을 유일한 기준으로 행동해왔던 사람들이 느닷없이 돈이 아닌 더 바람직한 어떤 것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할 수 있을까?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왜냐?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사회정의를 생각해본 적도 없이 오로지 시험성적으로 살아오던 사람들이 사법시험이나 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고 해서 갑자기 사회에 대한 정의감이 불끈 솟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법률가들에게만 사회정의를 심판해달라고 맡기는 것 자체가 잘못된 발상이다. 사회의 약자와 억울한 사람에 대한 공감능력과 정의감은 시험성적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판·검사에 대해 특별대우를 하는 것 또한 우리사회의 잘못된 관행이므로 완전히 바꿔야 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사회는 절대로 시험성적이나 돈으로 구성되지 않으며 구성될 수도 없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잘못된 가치관을 혁명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은 시험성적이나 돈에 의해 차별받아서는 안 되며,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우리 모두에게 공유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재난지원금의 선별적 지급을 주장하는 이낙연, 김상조, 홍남기 같은 인간들을 나는 경멸한다. 보편적으로 발생한 국가적 재난에 대해 모든 국민에게 동일금액을 보편적으로 지급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지들이 뭔데 자기들 맘대로 선별해서 지급한단 말인가? 대단히 잘못된 발상이다.)
그렇다면, 인간사회를 구성하는 궁극적 요소와 그 원리는 무엇인가?
인간사회가 시험성적이나 돈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면, 우리 사회구성의 옳고 그름을 가를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무엇인가? 그 기준은 마땅히 인간사회를 구성하는 초석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인간의 존엄성, 尊嚴性, Menschenwürde, human dignity》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어느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가치다. 이 존엄성을 구성하는 하위 가치는 자유, 평등, 연대의 세 가지다. 이 세 가지를 이 땅에서 실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의 존엄성이 실현되기 때문이다.
자유, 평등, 연대의 가치가 도대체 어떻게 실현된다는 건가? 칸트의 정언명령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 “네 행동의 기준이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동하라.” 같은 의미로 2천 년 전 팔레스타인의 예수가 이미 말했다. “네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대접하라.”
맞는 말이지만 현실에서는 쉽지 않다. 세상엔 선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 검찰조직처럼 악행을 손쉽게 저지르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독일의 인사조직론에서는 반드시 두 가지 원칙을 지키도록 조직을 설계한다. 독일인들은 성선설이냐 성악설이냐 이런 것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무조건 두 가지 원칙을 지키면 된다.
첫째는 투명성이고, 둘째는 공정성이다.
이 두 원칙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투명해야 공정해지고, 공정해야 투명해지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원칙에 따라 조직을 설계하면 자연스럽게 자유, 평등, 연대의 가치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숨기는 놈이 범인이다”는 말을 흔히 듣는다. 그렇다. 이동재, 한동훈, 윤석열은 서로 짜고 범죄를 저질렀음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왜냐? 지금까지 범죄의 증거물과 현장을 계속 숨겨왔기 때문이다. 불법행위가 없었다면, 그런 행동을 했을 리가 만무하다. 떳떳하다면 왜 숨기겠는가?
검사가 조서를 작성하거나 수사할 때 모든 언행을 투명하게 촬영하고 영구보존하도록 하며, 관련자가 요구할 경우 언제라도 복사하여 제공하도록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이 발견되면 그 책임을 검사에게 물어야 한다. 이것은 재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판결문을 작성하게 된 과정의 모든 기록과, 재판정에서 오고간 언사들까지 촬영하여 관련자들이 요구할 경우 언제라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이 과정에 오류가 발생한 경우에는 법관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자신의 언행이 만천하에 고스란히 투명하게 드러난다면 공정하게 수사하고 심판하지 않을 수 없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인간의 양심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의 심연에 옳고 그름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칸트가 이미 통찰했듯이, 인간의 이성(理性)이란 진선미성(眞善美聖)을 분별하여 종합·판단할 수 있는 선험적 능력이다. 투명성과 공정성이라는 조직설계의 원칙이 인간의 이성을 활성화시키는 것은 분명하다.
앞으로 잘 보라. 민주당 의원들 중에서 이렇게 투명하게 하려는 검찰개혁법안과 사법개혁법안에 반대하거나 미적거리는 사람은 바로 윤석열과 내통하는 자일 것이다. 윤석열의 악폐를 뻔히 보면서도 정치공학적으로 잔머리 굴리는 놈들이 곧 숨기려는 놈들이며 그들이 공범이다.
결론은 추미애가 옳다는 것이다.
윤석열의 잘못을 보고도 내버려 두는 것은 그 악행에 용기를 불어넣는 행위다. 나경원의 자식들에게는 압색조차 없이 무혐의로 종결한 것에 대해서도 법무부 감찰을 통해 압색하지 않은/못한 이유를 캐물어야 한다. 압색영장을 기각한 판사에 대해서는 국회가 탄핵을 준비를 해서 조국 교수 자녀와 동일한 정도의 압색을 하도록 사회적 압력을 가해야 한다. 왜냐? 그게 공정하게 수사하는 것이고 비례의 원칙에도 부합하기 때문이다. 불공정한 행위 자체가 불법이요 범죄행위이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보편적 상식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서는 동일한 기준으로 감찰하고 처벌하는 일을 귀찮아도 일관성 있게 지속해야 한다. 그래야 검찰이든 법원이든 조직을 정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윤석열이든 한동훈이든, 어떤 검사라도 조그마한 잘못이라도 보는 즉시 징계처분을 내려야 한다. 지금까지 이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윤석열과 검사들이 기고만장하는 것이다. 지금 검사들 대부분이 완전히 잘못된 버릇에 빠져있다. 고치는 방법은 추미애처럼 옳고 그름의 기준에 따라 일관성 있게 지속적으로 징계처분하면 된다. 못된 버릇은 그렇게 해야 고쳐진다.
그러므로 추미애가 옳다. 더 자주 잘못이 보이는 족족 검사들을 징계처분하라. 탄핵할 수 있으면 탄핵해도 좋다. 역풍을 두려워 말라. 옳은 것은 옳은 것일 뿐, 잘못된 것을 그대로 두면 더 큰 역풍이 분다.
끝으로 하나 더, 법왜곡죄(Rechtsbeugung)에 대하여
판사들의 경우 인간, 조직, 사회를 보는 인식지평이 밴댕이 콧구멍처럼 협소하고 질적 수준도 낮은데다 그마저도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판결하는 경우가 있어서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법왜곡죄를 신설해서 법조문을 왜곡하여 해석한 경우 처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개혁을 위한 전략·전술적 접근(2)_‘두려운 무기’를 갖추고 ‘사람 보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적폐세력이 두려워하는 무기를 들고 있어야 한다.
작년부터 이어온 윤석열의 난동사태에서 미진하지만 행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다했다. 더 할 수 있다면, 윤석열의 다른 비리들까지 전부 모아서 다시 징계처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법원이 제동을 걸면 또 다시 하면 된다. 징계처분의 무기는 언제라도 들고 있어야 한다.
징계처분 이외에도 검찰의 수사권 박탈을 위한 재빠른 입법, 윤석열을 한큐에 거꾸러뜨릴 수 있는 강력한 인물을 공수처장 후보로 예정, 윤석열(과 한동훈을 세트로 묶어서) 탄핵 등과 같은 무기를 들고 있어야 한다. 여차하면, 곧바로 발사할 수 있어야 한다.
조미연, 임정엽, 홍순욱 등 윤석열 관련 판사들에 대해서도 탄핵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헌법재판소가 어떻게 결정을 하든 말든, 무기로 들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준비된 무기는 정의롭지 못한 자들에게는 두려움이 된다.
적폐세력에게 선의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도 모르는가.
적폐세력의 의도를 알아야 한다
아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검찰조직이 법원, 언론사, 친일독재세력 등과 연합하여 문재인 정부를 고꾸라지게 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하다.
진작에 입법부가 일을 했어야 했다. 작년부터 이런 조짐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20대 국회에서는 쪽수 부족으로 어떤 조치도 취하기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21대 국회가 출범하지마자 전광석화처럼 검찰조직과 법원조직의 잘못된 구조와 시스템을 입법으로 개혁했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낙연은 한 일이 없다. 국무총리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말이다. 아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아직도 공수처는 설치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당하면서도 검찰의 수사권을 폐지하지 못하고 있다. 가장 위험한 ‘범죄집단’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있는 셈이다. 적폐세력들이 고사되거나 퇴출되도록 입법하지도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오히려 적폐세력에게 안방을 내주는 멍청한 짓을 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이낙연을 비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이낙연은 적폐세력 내지 부패한 세력과 협치를 하려고 하는 등 가장 멍청한 방식으로 싸움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빠른 시일 내에 퇴출되어야 할 세력일 뿐이다. 국정운영의 파트너로 삼으면 안 되는 세력이다. 정치인은 국민의 아픔을 대신해서 싸워줘야 하는데, 이낙연은 싸움의 기술을 전혀 모른다.
둘째, 이낙연은 180석이라는 완벽한 정치 환경에서도 국민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기로 작정한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대권에 욕심이 있다면 이 따위로 정치하는 것은 무능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뿐이다.
셋째, 정치란 국민 개개인의 의지(will)를 알아내고 관료집단을 장악해서 국민의 일반의지(general will)에 부합하는 정책을 펼쳐야 하는데 이것을 해태하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 이런 세 가지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이낙연 자신에게는 국가경영에 관한 비전, 목적, 방향이 전혀 없고, 민주당의 비전, 목적, 방향에 대한 어떤 헌신과 열정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의원들 또는 보좌진에게만 귓속말로 했는지 모르겠다.
다섯째, 비전, 목적, 방향이 없어 국가와 민주당이 어디로 가려는 것인지에 대한 방법론, 즉 전략이나 전술도 실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아래 도표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옛말은 진리다.
국민들이 사람을 보는 안목을 기를 필요가 있다. 이낙연을 당대표로 뽑는 수준의 안목으로는 훌륭한 정치를 기대할 수 없다. 180석의 정치권력을 가지고도 윤석열 한 사람을 제압하지 못하는 수준의 능력으로는 국가를 운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운영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혁신도 필요하지만, 제도만으로는 안 되며 적재를 적소에 등용하는 능력, 즉 사람을 보는 안목이 절대로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부적합한 사람을 만나 고생한다. 내 주위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다. 배우자나 사업파트너를 잘못 만나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사람 보는 안목이 부족해서 그렇다. 지금 한국의 정치지형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에도 여러 양아치들과 수박들이 많기 때문이다.
문재인도 본인 자신은 선한 성품을 가지고 있지만, 윤석열, 최재형, 노영민, 김상조, 홍남기 등 공직에 앉혀서는 안 되는 사람들을 등용하는 등 사람 보는 안목이 부족하다. 이런 것은 청와대 보좌진에서 충분히 걸러주었어야 하는데, 그렇게 못한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이낙연의 과거 행적을 보면, 정치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국무총리 시절 행정부에서 해야 할 국민적 과제 중 하나가 조국 법무장관과 그 가족이 멸문지화되는 상황에 처했을 때 뭔가 조치를 취했어야 헀지만, 강 건너 불 보듯 했다. 나는 그때 이낙연은 앞으로 어떤 일을 맡겨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국무총리라면 내각을 하나의 팀(one team)으로 만들어서 한 목소리를 내도록 했어야 한다. 검찰이 정경심 교수에 대한 잘못된 공소장을 법원에 제출했을 때, 곧바로 윤석열에 대한 징계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윤석열에게 함부로 까불면 징계처분을 받을 수 있다는 압박을 가했어야 했다. 보다 못한 추미애가 윤석열에 대해 징계처분을 내린 것이다. 아주 잘한 일이다. 법원이 엉터리 판단을 한 것뿐이다.
조국 장관 재임 중에는 윤석열에 대해 직접 징계청구를 할 수 없으니. 장관들을 대리하는 국무총리가 국무위원으로서 징계청구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조국 장관 혼자서 절대권력을 쥔 검찰조직과 상대해야만 했다. 이낙연은 총리권한을 가지고도 일체 도와주지 않았다. 마치 평론가처럼 말하곤 했다. 이낙연은 국무위원들을 한 팀으로도 묶어내지도 못했다. 이런 사람이 당대표를 하기 때문에 국민여론이 이렇게 악화되고 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옛말은 진리다.
나는 ‘사람 보는 안목’을 학문적으로 훈련받은 사람이고, 이에 대해 오랫동안 가르쳐왔다. 하도 답답해서 2016년부터는 《성취예측모형》이라는 강좌를 열어 〈사람숲협동조합〉에서 공개적으로 강의를 해왔다. 이 내용은 아마도 내년 봄쯤에 책으로 출간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