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라는 신화
우리집이 거대한 서재이고, KAIST융합인재학부에서 100권 책읽기를 권장하고 있지만, 나는 책을 지나치게 신성시하는 태도를 보면 ‘뭐 그럴 것까지 있나’ 싶다. 독서는 그저 책을 즐기는 행위이지 굳이 습관을 들일 필요까지는 없으며, 그런 태도가 오히려 책을 멀리 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이른 독서교육이 학교 성적을 올리는 지름길도 아니다. 책은 인생 언제라도 제대로 만나면, 그것으로 족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중학교때까지는 책을 별로 읽지 않았고 (주로 야구를 했다) 그러고도 행복했으며, 고등학교에 가서야 뒤늦게 책을 즐기는 사람이 됐을 뿐, 지금도 강독이 내 삶은 아니다. 나는 책 읽지 않아도 건강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중요한 건 ‘사고’, 생각하고 성찰하는 능력 시간 태도 관점이며, 책은 바로 그 사고의 순간에 생각의 단초를 제공해주는 수많은 것들 중 하나다. 여행이나 대화, 경험이나 인터넷, 음악이나 공연 만큼 중요한 것일 뿐이다.
다만, 많은 이들이 네이버뉴스의 헤드라인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페이스북에서 지인들이 돌려보는 뉴스로 정보의 대부분을 얻고 있을 때, 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 하나를 더 갖게 된다면, 그 사람은 남다른 사고를 하거나 뻔하지 않은 얘기를 할 수 있으리라 여길 뿐이다. (책 많이 읽은 분들이 페이스북에서 엄한 소리를 하는 걸 보면, 독서가 성숙과 성찰을 보장해주진 않는다.)
중요한 건 책이 아니라 뇌이며, 독서가 아니라 생각이고, 남에 대한 험담이 아니라 지적인 토론이며, 말로만 떠드는 근엄한 훈계가 아니라 나부터 시작하는 실천이며, 관념이 아니라 삶이다.
책이랑 씨름할 것도, 읽으려고 고통스럽게 마음먹을 것도, 읽기 위해 계획을 세울 것도, 읽지 않았다고 죄책감을 느낄 것도 없다. 그냥 손 닿을 만한 곳에 책 한 권쯤 놓여 있으면 된다.
카이로스의 시간 vs 크로노스의 시간
고대 그리스 신화에는 시간을 관장하는 두 신이 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가 그들이다. 카이로스는 목적의식이 개입된 주관적인 시간의 신으로서, 적절한 때, 결정적 순간, 기회를 주관한다. 반면, 크로노스는 과거-현재-미래로 흘러가는 객관적인 시간이다. 어떻게 보냈는지 상관없이 냉정하게 흘러가는 시간 말이다.
우리집도 서재가 카이로스의 공간이라면, 다락방은 크로노스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재가 지식과 통찰의 책들이 가득 채워져 있는, 그래서 기회를 찾는 계획의 공간이라면, 그래서 나만의 의미있는 밀도높은 시간을 만들어가는 공간이라면,
다락방은 그저 덤덤히 시간을 흘려보내며 언제 올지 모르는 영감을 기다리는 공간이다. 물론 오지 않는다고 해도 그만. 다락방에는 만화책과 오락기, 보드게임 그리고 뒹굴거릴 매트가 놓여있다.
예전부터, 이곳으로 들어오는 관문, 즉 다락방 입구에 평소 좋아하는 민조킹님의 작품을 걸고 싶었다. 그의 그림에는 사랑을 나누는 남녀가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품위를 잃지 않고 있으며, 세련된 그림체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캔버스 이전과 이후의 시간들을 상상하게 만든다.
몇 달 전 부탁드린 작품이 오늘 도착해, 이렇게 다락방 입구에 걸었다. 이제 이곳은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나 결코 헛됨을 걱정하지 않는’ 그래서 ‘시간을 유유히 낚는 공간’이 될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시공간처럼, 공간은 이렇게 의식 속에서 다시 시간과 하나가 된다.
'페이스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경태 (0) | 2020.12.21 |
---|---|
김주대 (0) | 2020.12.21 |
Choi Hanwook (0) | 2020.12.21 |
이승주 (0) | 2020.12.21 |
하승수 (0) | 2020.12.21 |
문상모 (0) | 2020.12.20 |
Tae Hyung Kim (0) | 2020.12.20 |
Dooil Kim (0) | 2020.12.20 |
이사연 (0) | 2020.12.20 |
Hokyun Cho (0) | 2020.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