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가을 잿빛 하늘의 날, 찾아온 사람과 만남들>
1. 2020년 10월이 저물어가고 있다. 이제 가을학기도 3주의 수업만 하면 끝난다. 한동안 전형적인 텍사스 날씨인 햇빛 쨍쨍한 날씨가 이어졌었는데, 요즈음 며칠은 계속해 부슬비가 대지에 떨어진 낙엽을 축축하게 적시는 잿빛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텍사스와 뭔가 어울리는 것 같은 날씨가 아니어서인지 텍사스에서 살기 시작한 지 15년이 되는데도, 이런 날씨는 나를 텍사스가 아닌 다른 공간으로 이동시킨다. 독일에서 지낼 때, 이런 날씨는 참으로 익숙했다. 잿빛 하늘에서 소리 없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내 키에는 맞지 않게 작은 중고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오갈 때, 나는 축축한 잿빛 하늘이 아닌, 햇빛 찬란한 날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하곤 했다. 그런데 되돌아보니, 독일을 생각나게 하는 이런 잿빛 하늘은 지독한 우울함을 가져다 주기도 했지만, 외부세계의 제한을 홀연히 넘어서서 나만의 내면세계로 깊숙하게 들어가 집중할 수 있는 생명 에너지를 주기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유토피아적 멘탈리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마 이 독일에서와 같은 잿빛 하늘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지금 여기’에는 없지만, ‘아직 아닌’ 미래에는 가능할 수 있는 보다 나은 세계에 대한 동경과 갈망이 유토피아적 멘탈리티의 특성이 아닌가.
2. 미국 대학에 와서 좌충우돌의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라는 제목으로 학위논문을 쓰게 되었다. 논문 주제를 정하기 위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던 나의 지도교수는 독일에서 대학을 다녔던 사람이다. 그를 나의 지도교수로 확정하고서 만났을 때, 독일식으로 하면 ‘박사 어머니 (독토르 무터/Doktor Mutter)’ 라고 해야 하는데, ‘박사 자매’ (한국말로 하니 조금 어색하지만)’ 즉 ‘독토르 쉬베스터 (Doctor Schwester)’로 생각하라고 따스한 미소 띈 얼굴로 내게 제안했다 미국에서는 박사논문 지도교수를 ‘어드바이저 (advisor)’라고 하는데, 독일에서는 ‘박사 아버지/어머니’라고 부른다. 이 호칭 자체로 학생과 지도교수의 위계적 관계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다. 나의 지도교수는 내가 왜 유토피아라는 주제에 관심하게 되었는지, 그 당시에 서툰 독어와 서툰 영어를 섞어서 두서없이 말할 때도 내가 표현하는 것보다 더 깊숙하게 나를 잘 이해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비로소 나를 ‘이해하는 사람’을 만난 것 같아서 감격스러웠다. 교수 연구실에서 대화하며 글썽이는 눈물을 참으려 애쓰던 순간이 참으로 많았다. 복잡한 개념과 사유세계를 접하면서 그 새로운 세계를 자신의 삶 속에 체현 할수록, 가족이나 친구 등 특히 주변 사람들로부터 이해받는 것은 점점 어려워진다. 그런데 누군가로부터 진정으로 이해 받는다는 경험을 가지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곤 하는 감동적인 경험이었다.
3. 나의 내면세계 깊숙이 있는 갈망, 바라는 세계, 바라는 관계 들에 대한 여러 가지 사유세계를 표현할 때, 진정으로 귀 기울여서 들으며, 공감하고, 그것을 긍정하면서 자유롭게 논문 쓰도록 나를 학문 세계의 들판에 ‘방목’해 준 선생을 만난 것은 내게 참으로 큰 행운이었다. 과정 철학 (Process philosophy)이 그의 전공 분야였지만, 자신의 분야로 학생을 제한하곤 하는 다른 교수들과는 달리, 그는 내게 전적 자유를 주었다. 내가 관심하는 것을 자유롭게 찾아보고, 공부 과정을 즐기면서 논문을 진행하도록 지켜보아 주았다. 나의 서툴고 어설픈 생각과 고민들을 늘 진지하고 따스하게 경청해주던 교수였다. 지금도 나는 그와 서로의 삶의 이야기를 지속해서 나누는 관계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런 영향 때문에 이제 선생이 된 나는 나의 학생들에게 ‘방목형’ 선생으로 남아있고자 한다. 자신의 가슴을 출렁이게 만들고, 열정이 생겨서 이것저것을 찾아보고 읽게 만들고, 그래서 잠 못 자면서도 계속 찾아보고 싶게 만드는 주제를 논문으로 택하라고 권하곤 한다.
4. 한국에서 책을 출판하기 시작하면서 만났던 편집자가 있다. 따스한 열정을 지닌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으며 나는 그와 일하는 것이 편하고 즐거웠다. 내가 빵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서, 합정동 근처 어느 베이커리에서 맛난 빵을 사서 내게 전해주기도 했던 편집자다. 그가 지난 5월 암 진단을 받고서 투병생활을 해 왔는데 이제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기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난 7월에 나와 주고받은 메시지에서 그는 “건강해져서 회사에 다시 복귀하게 되면, 선생님과 함께하는 새로운 책도 기획해서 작업해보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저녁을 잘 챙겨서 드시길”하는 배려의 말도 잊지 않았다. 나는 이번 겨울에 한국에 가면 맛난 커피와 맛난 음식을 먹으면서 다시 만나자고, 그리고 빨리 나아서 나와 다시 책도 만들자고 했었다. 그렇게 3개월 전에 이런 메시지를 주고 받았던 그가 이제 호스피스 병동으로 가야 한단다. 아득했다. 이 멀리 텍사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프고 저린 마음을 제켜 놓고 일하기가 어렵다. 마시던 커피를 들고서 서재에서 나와 멀리 창 밖을 내다보며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5. 한편으로는 남긴 재산의 상속세만 10조가 넘는다는 사람이 사망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엄청난 재산이다. 그에게 “큰별” 또는 “거인”과 같은 수식어가 붙여진 신문기사를 본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하여 ‘시대의 어르신, 스승, 큰별, 거인’ 등 과 같은 수식어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한 사람의 죽음에 지나친 과장을 담은 수식어는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파괴적 기능을 한다. 한 인간이 지닌 복잡한 결들을 보지 못하게 하는 왜곡된 이해를 전 사회에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재산을 쌓기 위해서 그가 평생 희생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삶의 가장 커다란 희생은 어쩌면 자기 자신의 삶을 방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이 우주에서 유일무이한 소중한 존재임을 모르는 사람이, 자신의 기업에서 일하는 타자들의 삶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참으로 어렵다. 상속세만 10조가 넘는다는 그 재산을 모은 그가, 자신의 죽음의 병상에서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의 따스함이라도 느끼며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마감했을까. 아니면 자본기계처럼 생산하고 모은 물질을 모두 뒤에 남긴 채 그 어떤 인간다운 갈망이나, 갈증조차 없이 이 지구로부터 단지 소멸한 것일까. 하이데거는 "인간만이 죽는다. 동물과 식물은 소멸(perish)할 뿐이다"라고 했는데, 나는 소멸하는 인간도 무수하게 많다고 생각한다. 온갖 욕망을 거짓말과 과장으로 포장하면서, 인간이든 종교든 모든 것을 자신의 권력에의 욕망을 위해 수단으로만 소비해 버리는 미국의 대통령, 그가 어떤 말을 하든 무조건 지지하겠다고 하는 열광적 복음주의 백인 기독교인들, 노동자들, 흑인과 라틴계 소수민족들을 바라본다. 도대체 인간이란 누구인가, 살아감이란 무엇인가 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묻지 않을 수 없다.
6. 지금 이 순간에도 곳곳에서 태어나기도 하고, 이렇게 기울어지기도 하는 생명들이 있다. 나의 가슴을 에이도록 아프게 하는 생명도 있고,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주는 생명도 있다. 이 다양한 모습들의 생명들을 품고, 기억하면서, 하루 하루 충일하게 살아가는 것—살아있는 내가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일이다. 잿빛 하늘은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기계적으로 이어지는 일상의 시계를 돌연히 멈추고,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돌아보게 한다. 인간만이 이렇게 과거와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시제’를 지니고 있는 존재가 아닌가. 잠시 멈추어 서서 이 살아감의 의미를 새로운 방식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것—잿빛 하늘의 날씨가 주는 선물이기도 하다. 이 유한한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소중한 것이고, 그 소중한 것을 어떻게 지켜내야 하는가에 대해서 사유하도록 초대한다. 이런 잿빛의 날, 고갱의 그림 제목은 우리가 소멸하는 존재가 아니라, 삶과 죽음, 과거-현재-미래를 사유하는 인간임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어디에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