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 저널리즘이 말해주는 것
‘진중권 저널리즘’이라는 말이 있다. 언론이 경쟁적으로 진중권 받아쓰기에 몰두하고 있는 상황을 비판하는 말이다. 통계에 따르면 대권주자 이낙연보다도 그의 기사 인용 빈도가 높다고 하니 그런 말이 나올만도 하다.
진중권을 받아쓰는 언론도, 그걸 비판하는 사람들도 동의하는 한가지 사실은 진중권의 말이 ‘팔린다’는 것이다. 그게 팔리는 이상 쓰지 말라고 해도 안쓸 리 없다. 팔린다는 의미를 단순한 클릭장사라고 치부하면 진짜 문제를 볼 수 없다. 조회수 장사로 광고수익을 기대하려면 진중권 기사 10개 쓰느니 연예 가십 기사 하나 쓰는 편이 낫다. 진중권 장사는 ‘팔리는 클릭’이 아니라, ‘팔리는 비평’이라고 보는 게 옳다. 이는 그의 비평에 동의하든 안하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진중권 저널리즘의 본질은 ‘비평의 외주화’다. 언론은 자신들이 진중권을 활용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진중권의 입에 자신들의 지면을 양도한 것이 사실에 가깝다. 김준일 대표는 ‘진중권 저널리즘은 언론실종 시대의 자화상’이라고 진단했다. 동의한다. 그가 말한 언론의 실종이란 따옴표 저널리즘에 관한 비판이다. <사실>은 기자의 취재로, <주장>은 외부자의 코멘트로 채워지는 기사 공식은 1절 끝나고 랩이 나와야 하는 가요 공식처럼 굳어졌다. 조져도 <사실>로 조져야 한다는 강박은 필연적으로 비평 저널리즘의 약화를 가져왔다. 이제 신문 사설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공란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그냥 언론탓으로만 돌리기엔 뭔가 헛헛하다. 그건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왔던 일이 아닌가. 진중권 받아쓰기가 따옴표 저널리즘을 도드라지게 보이게 한 건 사실이지만, 진중권을 받아쓴다고 이 문제가 더 특별해지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비평의 외주가 왜 갑자기 진중권에게 집중되었냐는 것이다. 그의 포지션이나 흥행성, 개인기량 같은 것으로 이 현상을 온전히 설명하긴 힘들다. 진중권의 입을 희소하게 만든 원인은 언론 밖에 있으며, 그들이야 말로 그의 입에 외주를 준 진짜 발주처다.
진중권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그는 비판하는 사람이고 조롱하는 사람이다. 진중권이 요즘 몰두하고 있는 것은 당대 권력의 이중성에 대한 고발과 조롱이다. 정치개혁에 대한 진심일 수도 있고, 개인적 앙심일 수도 있지만 그걸 구분하는 건 진중권 저널리즘을 논하는데 있어 별 의미가 없다.
진중권이 팔린다는 것은 이 장르물을 원하는 오디언스가 많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장르가 한사람의 따옴표로 채워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본래 그걸 감당해야 할 주체들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 비평의 공백을 채우고 있는 것이 진중권 저널리즘이다.
정부에 대한 견제-비평 기능은 언론의 책무이기 이전에 의회정치의 몫이고,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특히 야당의 몫이다. 대한민국에서 야당을 가장 잘하는 정당은 더불어민주당이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집권한 민주당은 별 매력이 없지만, 이 당은 야당 하나는 야무지게 한다. 최순실 국정농단 때는 안민석이 있었고, 세월호 참사 의혹에는 박주민이 있었고, 청년의원 김광진이 황교안 권한대행을 박살내던 장면도 볼 수 있었다. 엠비정권 사대강사업에 맞서던 저격수로는 김진애라는 이름이 떠오른다. 그들의 비평 기능은 야당일 때만 활성화된다. 야당이 이렇게 제 기능을 할 때 외부 스피커의 입으로 채워지는 지면은 제한적이다.
2020년으로 돌아와 보자. 문재인정부 최대의 위기였던 조국 사태 당시 야당 대표로 조국 저격수를 맡았던 것은 김진태 주광덕이었다. 윤미향 문제가 터졌을 때 국민의힘에서 공식 선발된 선수는 곽상도였다. 그들은 무엇을 했나? 김진태는 조국 부모의 무덤을 찾아 헤맸고, 주광덕은 조국 자녀의 생기부를 무단 공개해 고발당했다. 제버릇 음모론을 버리지 못한 곽상도는 윤미향 팬클럽에 준하는 활동으로 여당을 도왔다. 그들의 면면만 보아도 야당의 권력 견제 기능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리 문재인이 밉고 민주당이 싫어도 대중은 김진태 곽상도의 입을 바라보지 않는다.
정의당 역시 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작년 가을 민주당과의 선거법 공조에 목매고 있던 이 당은 온 나라가 들끓는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실종됐다. 데스노트에서 조국의 이름을 지운 건 상징적인 사건이었고, 이후에도 한참동안 그걸 만회할 만한 입장을 내놓지 못했다. 국민의힘의 무능이 진중권의 입에 힘을 키워준 자양분이었다면, 정의당의 비겁함은 정의당원 진중권의 입을 봉인해제한 촉발원인이었다.
정치에서 비평다운 비평이 실종됐을 때 외부의 입이 주목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정권 비판 여론이 가장 높았지만 야권 전체가 고구마였던 작년 12월, 진중권은 정의당에 탈당계를 제출하고 입 봉인을 해제한다. 진중권의 입을 희소하게 만든 건 권력 견제 기능을 상실했던 무능한 야당이며, 그들이 바로 진중권의 입에 지면을 발주한 원청이다.
이 글은 진중권의 말에 관한 가치판단이 아니다. 설사 그의 말이 형편없거나, 반대로 훌륭하다 한들 언론의 지면이 한사람의 sns 타임라인에 의존하는 것은 건강한 상황이 아니다. 진중권 저널리즘을 극복하려면 진중권의 비평이 맞나 틀렸나를 논하기 전에, 진중권의 자리에 있어야 할 비평의 공백에 관해 논하는 것이 먼저다. 이 공백이 메워지지 않는 한 어느날 진중권이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한다 해도 그 따옴표는 또 다른 외부인의 골방 비평으로 채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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