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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교수

<좌절과 절망감, 삶의 동반자로>

1. 지난주 코즈모폴리터니즘 세미나에 들어오는 S라는 학생이 만나고 싶다는 이메일을 보내왔다. 이메일 제목을 보니, “좌절감(Frustrations)”이다. 나는 이렇게 자신이 나를 만나고 싶은 이유가 자신 속의 ‘좌절감’이 이유라고 솔직하게 드러내었다는 것에 눈길이 갔다. 대부분의 동료나 학생들은 ‘어떻게 지내는가’라는 인사에 아무리 힘들어도 ‘잘 지낸다’라고 하는 문화 속에 우리는 산다. 자신이 힘들다고 밝히는 것은 웬만한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잘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을 약자의 위치로 들어가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점점 ‘가식의 문화’를 생산·재생산하면서 진정한 소통이 불가능한 삶 속에 점점 빠져든다. 이러한 문화에서 자신이 지금 좌절감 때문에 힘들다고 교수에게 속마음을 드러낸 학생이 고맙고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그의 좌절감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와 줌으로 만나면서 1시간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2. 코즈모폴리터니즘 세미나는 오래전부터 가르쳐온 것이지만, 이번 학기 학생들의 분위기는 각별하다. 코로나 사태를 경험하면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이 세계를 보는 것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절실하게 경험하기 때문이다. 국가적 경계를 넘어서서 코즈모폴리턴 정의, 환대, 연대를 실천하고 모든 이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확장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생물학적 생존에 가장 기본적인 먹을 것, 거주할 곳이 없는 사람들이 세계 도처에 있다. 코로나 사태에서 손을 자주 씻고 사회적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가이드라인을 지키는 것조차 불가능한 ‘사치’인 사람들이 이 세계에 훨씬 더 많다는 현실 앞에서 한 개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거대한 경제·정치적 제도와 구조 속에서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현실 세계의 복잡성을 알면 알수록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아무렇지 않았던 것들에 대하여 고민하고 딜레마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서 무기력감, 그리고 좌절과 절망감은 커진다. 나의 학생 S를 힘들게 만든 좌절감의 내용이었다.

3. 우리의 삶에는 외면적으로 보면 상충적인 것들, 공존할 수 없는 것 같은 반대 경험이 실제로는 함께 간다. 한때 나는 우리의 이성과 합리성을 동원해서 분석하고 문제의 원인과 해결하는 방식을 찾아내면 앞에 놓인 딜레마들은 해결할 수 있었다고 굳건히 믿었던 때가 있다. 철학의 과제는 문제들에 대한 명증성, 논리, 정밀성의 제시가 아닌가. 분석철학자들이 생각하는 철학의 책임이며 과제다. 그런데 이러한 분석철학적 입장이 인간의 삶을 드러내기에는 지독한 한계가 있음을 보기 시작했다. 나의 삶은 물론 많은 사람의 삶을 바라보니, 우리의 살아감이란 확실성보다는 불확실성, 명증성보다는 불투명성이, 필연성보다는 우연성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 또한 딜레마가 부재한 삶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기 시작했다. 절망감, 좌절감, 또는 딜레마는 그 종류와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이 바뀔 뿐 언제나 우리 삶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라는 더불 제스츄어 (double gesture)는 우리의 중요한 인식의 장치로서, 나 자신만 아니라 나와 만나는 학생들에게도 강조한다.

4. 한편으로는 좌절과 절망감을 품고서 우리는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의 통제-너머에 있는 문제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우리의 삶은 우리가 인식하고 알아차리기 시작하는 문제들과 딜레마들로 가득 차 있다. 좌절과 절망감, 무기력함이 자리 잡는 지점이다. 그런데 살아있다는 것은 거기에서 끝나지 말아야 하는 과제를 지닌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이 들어서는 지점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절망 한 가운데서 한 발자국씩 걸음을 내 딛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낙관은 데이터에 근거하지만, 희망은 희망하는 세계를 향해 씨름하고 고민하는 그 과정 자체에 있다. 낙관과 희망의 결정적인 차이다.

5. 나는 S와 이런 나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지닌 고민과 좌절감을 단번에 해결할 해답을 그 누구도 제시해 줄 수 없다는 것, 단순한 낙관주의가 아니라 이 삶의 복합성을 보면서 그 한 가운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조금씩 하는 것일 뿐이라며 나의 삶의 여정에서 나의 사유세계가 바뀌어 온 것을 그와 나누었다. 나는 그가 고민하고 있다는 것, 심한 좌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반가웠다. 세미나에서 읽고 토론하는 주제들을 자신의 구체적 삶과 연결시키는 그 진정한 ‘배움’의 여정에 들어서 있음을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6. 아는 것만큼 이 현실 세계의 문제들의 복합성이 보인다. 우리의 보기 방식이 ‘자서전적’인 이유이다. 정치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 들어와 공부하기 시작한 나의 학생 S, 앞으로 그는 더욱더 많은 문제들, 딜레마들을 보고, 듣고, 만나게 될 것이다. 좌절과 절망감이 찾아와 잠 못 이루는 무수한 밤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좌절감이 찾아올 때, ‘인생의 적’으로 거부하지 말자. 오히려 나의 삶에 찾아오는 친구로, 동반자로 맞이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 좌절과 절망감을 자신 속에 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삶의 정황에서 변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해나가는 것이다. 선생인 나는 나의 학생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타자를 보고, 이 세계를 바라보는 보기 방식에 새로운 변화가 오도록 가르치고, 글을 쓰고, 연구하는 일 자체가 나를 그 깊은 좌절감으로부터 나를 끄집어내는 방식이다. 나의 학생 S는 자기 삶의 정황에서 자신을 삶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가꾸어가면서, 주변에 개입하는 삶을 조금씩 연습하는 것이다.

7. 나와 S가 경험하는 좌절감의 정체, 그리고 그 좌절감을 넘어서는 방식은 각기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예상치 않은 방식으로 좌절과 절망감의 늪 속에 빠지지 않도록, 서로에게 손을 뻗쳐서 끄집어내어 주는 ‘동료 인간’이다. 그는 나에게 고맙다고 했지만, 나는 그가 고마웠다. 그와 이러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도 내 속의 절망감으로부터 내가 한 발자국 나오는 미소를 그가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삶의 동반자를 품고서 한 발자국씩 발걸음을 내 딛는다. 나도, 나의 학생 S도, 또한 이 글을 읽고 있는 곳곳의 동료인간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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