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살아야 하는가, 장미는 ‘왜’가 없다 >
1. 우울한 시기이다. 그 우울함의 짙은 그림자를 넘어설 생명 에너지를 어떻게 하루 하루 만들어갈 수 있을까. 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일들로 우울했던 잿빛의 한 주간, 내게 많은 위로를 준 글이 있다. 17세기 독일 시인인 앙겔루스 실레시우스 (Angelus Silesius)의 시, “장미는 ‘왜’가 없다; 장미는 단지 피어야 하기 때문에 피는 것이다 (The rose is without ‘why’; it blooms simply because it blooms)”이다.
2. ‘성폭행 의혹’만으로 이미 주홍글씨가 붙여진 P라는 시인이 있다. 그 의혹이 거짓이었음이 밝혀진 후에도 초기에 피해자 편이라는 ‘의로운’ 사람들에 의하여 성급하게 붙여졌던 성폭력 가해자라는 ‘주홍글씨’의 낙인은 그 존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한국 사회는 개인들은 물론 정치, 언론, 종교, 집단 등에서 무고한 의혹의 진실을 알고자 하는 사회적 인내심이 총체적으로 부재하다. ‘의혹 제기’만으로 모든 이들이 달려들어서 한 사람에게 린치를 가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의로움과 정의감을 증명하고자 하는 욕망을 표출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가짜뉴스나 의혹제기만으로 한 존재에 대한 사회적 죽임만이 아니라, 이렇게 존재론적 죽임까지도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이 도처에 존재한다.
3. 시인은 시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방식을 드러내며, 섬세한 존재의 결을 품고서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러한 섬세한 결들을 품고 사는 사람에게 한번 붙여진 주홍글씨가 쉽사리 지워질 수 없다는 것은 어쩌면 놀랍지 않다. 그 주홍 글씨의 결과는 단지 정신적인 것만이 아니다. 그 무고한 주홍 글씨는 그의 사회적이고 물질적인 삶과 연결된 모든 통로를 차단 받는 도구로 소환되곤 한다. 모든 통로가 차단되는 이런 폭력적 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생물학적, 사회적, 존재적 숨을 쉴 수 있을까.
4. 지난 10월 14일, P 시인이 자신의 삶을 마감하겠다는 페북의 포스팅을 우연히 읽었다. 절절한 언어로 그가 쓴 이 지구로부터의 ‘고별사’를 나의 텍사스 아침에 읽으며, 내가 개인적으로 알지못하는 ‘먼 타자’이지만, 그 존재의 절망감과 아픔이 내게도 전해져서 가슴이 저려왔다. 그리고 그가 참으로 다행히 무사하게 그 절망의 덫을 가까스로 빠져나왔다는 소식을 듣게 된 후에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참한 사회적 죽임에 대한 절망감이 나를 떠나지 않았다.
5. 정의와 의로움의 이름으로, 한국 사회 도처에서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무고한 사람들에게 함부로 붙이고 있는 정죄의 주홍글씨—의혹의 진실이 밝혀진 후에도, 의혹만으로 함부로 주홍글씨를 붙였던 사람들은 사과하거나 그 오류를 되돌리려고 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생명, 그리고 그 사람과 관련된 주변 사람들의 사회적 생명에 가하는 파괴적 '집단 린치’를 참으로 쉽사리 가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인간은 얼마나 가학적이고 폭력적 존재인가.
6. 지금도 여전히 종교의 이름으로, 정의의 이름으로 세계 곳곳에서 갖가지 폭력들이 벌어지고 있다. 코로나 사태에서 경험하듯 인간의 권력 욕망과 이기성이 만들어내고 있는 생태계의 파괴와 그로 인한 위기들이 우리의 정신세계는 물론 생물학적 존재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그뿐인가. 사랑이나 우정은 ‘교환경제’의 다른 이름이 되어버렸다. 철저하게 계산된 관계가 지배하고 있다. 손익계산 후에 이득보다 손해가 더 크다는 결론이 나오면, 다수의 사람들이 사랑이든 우정이든 더 이상 쓰지 않을 물건처럼 던져버린다. 사랑은 소비되고, 소모되고, 그 다음에 손익계산이 맞지 않으면 ‘쿨(cool)하게’ 버려지는 소모품으로 전락하곤 한다. 이런 가치가 팽배하는 사회에서 사랑의 종말이나 상실을 아파하는 것은 ‘쿨한 것’이 아니다. 손익계산을 해서 손해보는 것 같은 사랑이나 우정을 단호하게 파기하는 것이 ‘세련된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모든 것이 이렇게 ‘기브앤 테이크’라는 ‘교환 경제’로 전락해버렸다.
7. 계산-너머에 존재하는 진정한 우정이나 사랑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듯하고, 갖가지 폭력들이 종교, 정치, 문화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 현대사회에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분석해보면 공허한 욕망 이외에는 살아갈 이유가 별로 없어 보인다. 이 다층적인 부조리의 삶에서 자살하지 않고 살아갈 이유는 무엇일까. 그래서 까뮤는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자살이야말로 가장 진지한 철학적 주제”라고 하는 것 아닌가. 인간의 이성과 합리적 추론은 중요하다. 산문의 세계다. 그러나 이러한 이성과 합리성만을 신봉하게 될 때, 생물체같은 존재함의 방식을 파괴하는 덫에 빠지게 된다. 우리의 존재함이 지닌, 사랑이나 우정이 지닌, 또는 관계의 진정성이 지닌 소중함과 아름다움은 언제나 이미 ‘합리적 추론 너머의 세계’에, 시적 세계에 존재한다. 실레시우스의 시, “장미는 왜가 없다”는 이러한 ‘합리적 추론 너머의 세계’를 느낄 수 있는 작은 문을 조용히 열어준다.
8. ‘왜’ 살아야 하는가. ‘왜’ 사랑하는가. ‘왜’ 우정을, 관계를 소중하게 가꾸는가. ‘왜’는 없다. 누구도 이 지구상의 삶을 선택해서 온 사람은 없다. 그러나 존재하기 시작하게 된 그 존재함 자체가 바로 이 살아감의 의미와 이유가 된다. 장미에게 도대체 ‘왜’냐고 묻는 합리적 추론은, 존재함의 신비와 합리성-너머의 소중한 세계를 보지 못하게 한다. 앙겔루스 실레시우스는 오늘도 우리에게 전해준다.
왜 살아야 하는가.
살아감에는 ‘왜’가 없다; 살아있기에 치열하게 살아내는 것이다.
왜 사랑하는가.
사랑에는 ‘왜’가 없다; 사랑하기에 치열하게 사랑하는 것이다.
9. 합리적 손익계산을 과감하게 넘어서서, 자신속에 ‘장미’를 피워내고, 가꾸어내어야 한다. ‘장미’가 상징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든, 우정이든, 관계든, 존재함 자체든, 그 ‘장미’를 소중하게 자신의 삶 한 가운데에 품고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살아남아서, 합리적 계산 너머에서 다가오곤 하는 이 삶의 축제성, 장미의 아름다움을 만들어가고 지켜가야 한다. 이 세계의 부조리와 끔찍한 폭력성이 주는 절망감 한 가운데에서도, 이 삶은 예상너머의 놀라운 일로 여전히 가득하다는 것—이 우울하고 절망적인 것 같은 폭력의 시대에 생명의 신비와 소중함을 부여잡고 지켜내야 할 이유다
<타자의 삶에 훈수 두지 않는 사회, 조약돌의 철학 >
1. 한때 다른 나라나 지역을 여행할 때 마다 작은 종을 기념으로 사곤 했었다. 무겁지도 않고 종소리가 좋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기념품점에서 대량으로 진열되어 있는 종들이 모두 일률적으로 똑같다는 사실을 돌연히 알아차리고, 그 기념품 종이 내가 방문하는 도시나 나라에 대한 나의 독특한 기억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그래서 새로운 나라나 도시에 가서 기념품점에서 종을 사곤 하던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새롭게 가지게 된 여행 예식은 작은 조약돌을 가지고 오는 것이었다. 조약돌이 상징하는 것이 나의 삶의 철학과 맞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이다.
2. 아무리 무수한 조약돌이 모여 있어도 그 어떤 것도 동일한 것이 없다. 조약돌이라는 유사성을 지니면서도, 하나하나의 조약돌은 그 자체로 유일한 독특성을 지닌다. 마치 우리의 얼굴과도 같다. ‘얼굴은 이름보다 선행’하는 자리다. 우리가 지닌 이름이란 나와 상관이 있기도 하고, 상관이 없기도 하다. 이름은 가족의 계보와 연결되어 있어서 나의 선택과는 상관없이 나의 배경을 연결시킨다. 이름으로 가족, 국적, 문화 등이 드러나는 나의 외면성을 구성할 뿐, 내가 누구인가의 본질을 드러내지는 못한다.
3. 조약돌들에서 나는 인간이 각자의 삶에서 독특성을 발현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개별성의 철학’을 엿보게 된다. 그 어느 조약돌도 동일하지 않다는 것, 모든 조약돌이 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각기 다른 존재방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조약돌이 있는 장소에 가면 앉아서 그 조약돌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곤 한다. 어느 하나도 같지 않다는 사실—중요한 인간 이해를 상기시키고 확인시킨다.
4. 똑같이 생긴 조약돌이 없는 것처럼, 우리 각자는 개별적 존재이다. 한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만드는 선택,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 갈망하는 것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정서라는 이름으로, 관습의 이름으로, 누군가의 배우자, 누군가의 부모, 누군가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타자의 삶이 지닌 독특한 선택과 결정에 훈수를 두는 것은 부당하다. 한 인간이 자신과 다른 개별적 존재임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5. 한 사람의 학연, 지연, 직책, 출신 배경 등에 집착하는 사회일수록, 한 인간이 지닌 고유한 개별성을 보지 않으려고 한다. ‘나라면 그런 결정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다 너를 생각해서 하는 충고다,’ ‘국민 정서에 맞지 않는다’ 등의 서사로 우리는 타자의 삶에 불필요한 개입을 하고, 가십을 만들고, 훈수를 두려고 한다. 이런 사회일 수록 민주적 개인주의가 발전하기 어렵다. 이기주의와 다른 개인주의는 모든 관계를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민주적 관계로 만드는 데에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되는 토대다. 건강한 개인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는 한 개인의 개성, 창의성, 독특한 기호와 선택을 억누름으로써, 개별인의 삶은 물론 정치, 종교, 교육, 예술, 학문 등 다양한 영역에서 창조성의 토양을 메마르게 한다.
6. 타자의 삶에 훈수 두는 사회로부터 과감히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정치도, 예술도, 문학도, 학문도, 개인의 삶도 미성숙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비본질적인 것이 본질적인 것들을 대체하게 만드는 것—건강한 개인주의를 받아들이지 못할 때 일어나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다. 개별인들의 삶의 궤도를 타자의 시선과 관습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놓고서 획일적인 삶의 방식만을 택하라고 강요하고 훈수두는 사회는 이 21세기에 퇴보할 뿐이다. 불법을 행하고, 타자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닌 한, 나와 다른 선택을 하고 나와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조약돌과 같은 우리의 개별성의 철학을 체현하는 방식이다. 인류에 기여하는 사상, 예술, 학문, 기술 등은 개별인들의 독창적 시각, 독특한 삶의 철학과 선택을 존중하는 사회에서 꽃피울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조약돌의 철학’이 체현되는 때를 나는 갈망하고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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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그리이스, 남아프리카, 프라하, 유대인 강제 수용소 등에서 만난 조약돌들의 일부를 아래 사진으로 이곳에 나눈다. 각기 다른 모습의 조약돌은 내게 각기 다른 향기와 기억과 경험을 담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