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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원기교수

지루하지만 조금씩》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 그 어느 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 그것이 역사가 주는 최고의 교훈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하기에 제 아무리 강대한 것도 결국은 사라져 흔적도 희미해지고, 미약하기 그지없던 것이 강대한 것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천천히 아주 느리게 변합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탁월한 영웅 한 사람이 시대를 이끌어간다고 보지 않습니다. 역사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절대다수의 공감 속에 아주 조금씩 앞으로 나아 갈뿐입니다. 그러하기에 역사는 지루한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포기하지 말고 이 지루함을 감당해야 합니다.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저는 문재인 정부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느 한 사람에게서 역사의 희망을 발견하지 않습니다. 문재인정부는 이명박 박근혜 시대를 뒷처리하는 설거지정권이 될 것이고, 그 설거지에도 시간이 부족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운 나라”를 이루지 못했다고 타박하고 애초에 사기였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촛불민심을 배신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공정과 결과의 정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운 나라”를 이루지 못했다고 타박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속으로는 오히려 그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워낙 보수적인 사회입니다. 그리로 가지 말라고 저주하고 음해하는 보수권력의 힘이 매우 완강합니다. 그 시절로 돌아가지 않는 것조차도 쉽지는 않습니다.

정치에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저의 기대보다는 문재인 정부가 훨씬 잘하고 있습니다. 설거지를 넘어서, 그래도 좋은 방향으로 조금씩 새롭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봅니다. 민주주의는 대다수의 시민들이 만들어가는 정치입니다. 시민들이 포기하면 대통령도 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시민들이 요구하기를 포기하면 정치권력은 시민들보다 자본권력의 요구에 따를 것입니다. 정치인들을 욕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시민들이 포기하지 말고 여야 정치인들에게 끊임없이 근본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요구하고 감시해야 합니다. 왕 노릇하는 것이 어렵듯 민주 사회에서 시민 노릇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저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문재인 정부와 여당 정치인들에게 남은 집권기간 동안 세 가지 일을 처리해 주기를 요구합니다. 하나는 공수처법을 통과시켜 최소한의 검찰개혁을 해달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징벌적 배상 제도를 통해 언론개혁과 공정보도의 토대를 만들어 달라는 것, 또 하나는 군산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미국의 지배를 벗어나서 한반도 평화체제를 확고하게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야당 정치인들에게도 함께 요구합니다. 이것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은 미약하지만 저의 소중한 한 표로 선거에서 심판하겠습니다. 이 세 가지만이라도 잘 처리해 주기 바랍니다. 그것만 잘 처리되어도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운 나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아가겠습니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될 자유》

여기 저기서 테스 형을 부릅니다. 저는 테스가 동네 형 이름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더이다. 소크라테스라고 합니다.

소크라테스라 하면 ‘배고픈 사람’이 떠오릅니다.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사상가인 존 스튜어트 밀이 그의 저서 『자유론』에서 ‘배고픈 소크라테스’와 ‘배부른 돼지’라는 재미난 비유를 사용합니다. 그래도 존 스튜어트 밀에게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배부른 돼지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편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를 주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자유는 ‘배부른 돼지’가 될 자유입니다. 보수야당과 집권여당의 상당수가 여전히 신자유주의를 신봉하고 있습니다. 제가 자주 해온 말이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도 아니고 민주주의도 아닙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자유는 다수의 시민이 배제된 일부 자본권력만의 자유방임이고, 그들이 주장하는 민주도 다수의 시민이 배제된 자본권력만의 특권을 옹호하기 위한 민주입니다. 민을 위한 보편적 자유주의가 아닙니다. 자본권력이 주장하는 자유주의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합니다.

요즘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이병한 작가의 『유라시아 견문』을 틈틈이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저자와 견해를 달리하는 부분도 있으나 이제는 인류문명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견해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바웬샤와 함께 폴란드의 자유노조를 이끌었던, 리샤르트 레구트코와의 대담에 특별히 눈길이 갔습니다. 그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태어나 반공주의자로 활동하고 폴란드 공산주의를 무너뜨리는데 사상적인 기반을 마련한 사람입니다. 이른바 폴란드 자유화 운동, 민주화운동의 대부입니다. 그는 40년 살았던 공산주의와 30년 경험한 자유주의를 비교하며 서로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공산주의도 자유주의도 획일적인 전체주의라고 말합니다. 좌파 전체주의에서 우파 전체주의로 이행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자유주의도 공산주의만큼 원리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이념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혼자서만 살아갈 수도, 같이서만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홀로만 살기에는 너무 외롭고 같이만 살기에는 너무 답답합니다. 인간은 어느 정도는 따로, 어느 정도는 또 같이 살아가야 합니다. 인간은 개인으로 홀로 살기 위해 자유가 필요하고, 공동체 속에서 같이 살기 위해 평등도 필요합니다. 자유와 평등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저는 극단적인 자유주의와 극단적인 평등주의에 반대합니다.

자유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자이기도 합니다. 사실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나 인간관으로 보면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의 물질적 욕망을 긍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만 공산주의는 인간의 물질적 욕망을 공동으로 실현하려하고 그 성과를 골고루 분배하려 하면서 조금 주저하는 측면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개인의 물질적 욕망을 주저 없이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쪽은 자본주의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물질적 욕망을 성취하는 점에서는 공산주의보다는 자본주의가 경쟁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인간의 물질적 탐욕을 성찰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 삶의 궁극적 목표가 단지 ‘배부른 돼지’가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입니다. 지금 신자유주의 체제는 기본적으로 소수 자본권력의 물질적 탐욕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회경제 체제입니다. 결과적으로 부익부와 빈익빈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역사 이래로 지금처럼 빈부격차가 심했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모든 절대 권력은 부패하게 되어있고 자본권력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자본권력이 국가권력을 넘어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국가권력은 기간제 권력일 뿐이지만, 자본권력은 세습이 되고 국가를 초월합니다. 다수 시민의 권력을 위임받은 국가권력이 자본권력을 관리하고 제어해야 합니다. 힘없는 개인이 그들을 직접 관리할 수 없습니다. 그래야 다수의 시민들이 경제적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자유방임 속에서 살아온 자본권력의 입장에서 보면 현 정부가 독재정부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몹시 시끄러운 태극기부대, 어버이연합회, 새로 등장한 서북청년단, 대형 교회, 대부분의 주류 언론과 그리고 의사협회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자본권력의 자유방임만을 대변하고 옹호하는 특권층 자유주의의 전위부대입니다.

이제는 자본권력에 대한 자유의 투쟁으로 역사가 전환해야 합니다. 물질적 탐욕의 노예가 아니라 물질적 탐욕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어야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옛 성현들의 가르침이 한결같이 그러합니다. 왕정이든 귀족정이든, 그것이 공산주의가 되었든 민주주의가 되었든, 물질적 탐욕의 노예가 된, 배부르고 탐욕스런 돼지들이 집권하는 사회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한 사회는 반드시 부패하고 패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 시절 어르신들께서는 늘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사람이 되라고. 사람 같은 사람이 돼야 한다고. 그것은 옛 성현들의 한결같은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저는 인권을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며 존중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되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들, 단지 배부른 돼지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 천부인권을 주장하고 자유를 주장할 때는 매우 당혹스러워집니다. 나의 인권만큼 다른 사람의 인권도 소중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인권을 침해할 권리까지 타고난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인권만큼 동물의 권리도 소중합니다. 인간이 지구의 자연 생태계를 파괴할 권리까지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것은 더 더욱 아닙니다. 단순히 사람의 육신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서 천부인권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와 남의 인권을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 존엄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온전한 인간이 되는 길은 멀고 험난합니다. 끊임없이 심신을 수양하고 도야하여 성인의 경지를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자유는 배부른 돼지가 될 자유가 아니라, 아마도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될 자유일 것입니다.

* 자유롭지 못한 제가 생각하는, 자유에 대한 간략한 소견입니다. 가을 하늘이 더없이 맑습니다. 푸른 하늘의 노고지리를 보며 자유를 노래했던 김수영을 떠올려 봅니다. 그저 하늘이 청정하기로, 바쁜 시간에 조금 틈을 내어 그냥 두서없이 몇 자 적어봅니다. 페친 여러분 모두 즐거운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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