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일석

페이스북 2020. 9. 9. 21:50

 

흙수저 커밍아웃으로 정신적인 시달림에서 해방된 뒤로도 유독 나를 괴롭힌 고참이 하나 있었다. 이름이 '구'자로 끝나고 성질이 워낙 지랄같아서 '미친개'로 불리던 그는 갓 병장으로 진급하여 내무반장을 맡고 있었다.

이 인간은 툭하면 집합을 시켜서 구타 및 각종 가혹헹위를 일삼았는데, 대개 그 집합은 나를 때리는 순서에서 끝났다. 계급으로도 맨 막내인데다가, 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쓸 데 없이 맷집이 좋아서 꿋꿋하게 버티다 보면 때리는 쪽에서는 겁이 나든지, 더 열을 받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된다.

어떨 때 겁이 나면 슬그머니 집합을 마치거나, 열받으면 전설로만 존재하던 가혹행위로 넘어가려고 했는데 그 단계에 이르면 천사같던 동기 고참이 뜯어 말려서 집합이 끝났다.

집합이 끝나고 나면 다른 고참들이 나를 불러 ''좀 개기지 마라. 우리가 불안해 죽겠다''고 타일렀다. 나는 그냥 잘 맞을 수 있어서 잘 버틴 것 뿐인데, 그게 ''개기는 것''으로 보였고, 그 미친 개도 그렇게 생각을 해서 나에게 아주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

첫 휴가를 마치고 귀대하는 날, 나는 어머니까 싸주신 떡을 양 손에 바리바리 들고 위병소를 지나 내무반으로 향하는데 병기 창고에서 보초를 서던 고참이 나를 보더니 달려와, 내무반 가지 말고 사무실로 가 있으라고 등을 떠미는 것이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채 바로 근처에 있던 사무실로 들어가 멍하니 앉아있는데 30분 정도 지나 헌병대 집차들이 왱~~하며 지나가는 거다.

사연을 간단히 줄여서 얘기하면 그 미친 개가 나 휴가 귀대하는 날을 나 잡아죽이는 날로 잡고, 내 귀대 시간에 맞춰서 집합을 시켰고, 그 바로 아래 고참들이 잘못하면 정말 내가 맞아죽을 수도 있으니 보초를 서는 고참에게 내가 보이면 내무반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고 시켰다는 것. 그런데 내가 귀대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자 미친개는 당연히 더 광분해 날뛰었고.

그렇게 내 고참들을 비롯한 내무반원들이과 나 하나 지켜주겠다고 미친개의 얼차려를 받아내고 있는 동안, 마침 우리 내무반 옆을 지나던 헌병대 소위가 낌새를 알아차리고 헌병들을 불러올린 것.

그래서 나 잡아죽이겠다고 벼르던 미친개는 정작 내 얼굴도 못 보고 영창으로 끌려갔다는 슬픈 이야기.

그런데 혹시 영창 갔다가 돌아와서 나를 더 괴롭히지 않았을까 걱정되겠지만 그게 또...

본부대와 헌병대는 끗발에 있어서 묘한 경쟁 관계에 있었는데, 헌병대기 유일하게 꼼짝 못하는 게 정훈부였다.

군인들은 왜 그렇게 영화를 좋아하는지 영화라면 아주 환장을 했는데, 그걸 관리하는 곳이 정훈부였기 때문이다. 체육관에서 하는 공식적인 상영 외에는 비공식적으로 영사기와 필름을 빌려줬다. 그런데 정훈병이 싫다고 하면 세상 무슨 방법을 써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내 사수들은 그거 가지고 적당하게 빌려주기도 하고 애먹이기도 하면서 끗발을 유지했는데, 나는 그냥 빌려달라고 할 때마다 끗발을 부리기는커녕 그냥 싹싹하고 상냥하게 빌려줘서, 다른 부대는 물론 헌병대에서도 나를 알기를 무슨 예수님 쯤으로 알았다.

본부대 고참이 영창에 들어오자 펑소의 경쟁심이 발휘된 헌병들이 미친개를 돌아가면서 괴롭히다가, 마칠 때는 꼭 ''너 돌아가서 정훈병 괴롭히면 다음에는 영창이 아니라 군법회의에 갈 줄 알아라''고 을렀다.

그래서 영창 갔다 돌아온 미친개는 그 뒤로 내 눈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어쩌다 말을 할 때는 막 존댓달로 말을 하려고 그럴 지경이었다

군대 라떼 얘기로 "다음 얘기 기다리겠다"는 말씀까지 들을 줄이야. 흠... 그래서 나랑 엮이면 이상하게 누군가 영창으로 가고, 나는 그만큼 더 편해지는 영창 데스노트 얘기가 하나 더 있는데, 오늘 박시영TV가 있는 날이라 준비에 열중해야 하므로 그건 내일 하기로 하고, 막간으로 지금 시국과 더 관련 있는 얘기 하나.

그렇게 사단 정훈부로 배치됐는데 거기 선임하사인 상사님이 카투사 출신이었다. 출신이라기보다 주로 카투사 선임하사로 근무를 하셨는데 그곳에 오래 근무하려면 가끔씩 우리 군에서도 근무를 해야 한다고. 그래서 일종의 순환보직 차원에서 잠깐 우리 군에 와있던 게 나 있던 사단 정훈부.

그런데 이 분 매사가 완전 미국식이라 모든 게 합리적이기 이를 데 없어서 사무실에서는 거의 카투사나 마찬가지로 지냈다는. 심지어 내가 뭘 잘못해서 기합을 받더라도 너무나 정당하고 기꺼이 수긍되는 기합이라 육체적인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

게다가 하루에 하나 꼴로 지나가듯 원어민 영어를 가르쳐주는데, 예를 들면 이런 식.

내가 뭘 잘못 했을 때 차렷을 시켜놓고 근엄한 목소리로, "내가 널 인간으로 만들어주겠어"라고 말한 다음, "이걸 영어로 뭐라고 그러는 줄 알어?"라고 물어본다.

그럼 내가 떠듬떠듬 "I will make you a human." ㅋㅋㅋ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역시 고일석이라서 그렇게라도 대답하는구나" 하면서 "내가 너 인간 만들어주겠다를 영어로 하면 I will teach you. 뭘 가르쳐주겠다는 건 I will show you."

그러면 나는 바로 푸쉬업을 하든지 앞구르기 뒷구르기를 하든지 하면서도 속으로 "Oh, I will teach you, I will show you"를 즐겁게 되뇌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다 "일주일은 7일이다, 영어로 뭐야?" 하면 "A week is made of..." 어쩌구 하면 머리를 콩 때린 뒤에 "There are seven days in a week."라고 가르쳐주고, 내가 또 "오호~~" 하는 표정을 짓고 있으면 "그러면 우리 식구는 4명이다는 뭘까?"라고 묻는다.

나는 바로 응용력을 발휘해 "There are four persons in my family"라고 대답하면 잠시 갸우뚱하시면서 "person 아니고 people. There are four people in my family."

그래서 제대할 때 거의 통역병을 해도 괜찮을 수준이 됐다는.

이거 추미애 장관 아들 휴가가 60만 장병의 사기를 떨어뜨린다는데, 내가 군대 생활 편하게 한 게 더 사기를 떨어뜨리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아. 그런데 나중에 내가 용산 미8군에서 노가다를 한 적이 있다. 바닥 걸레질 하고 쓰레기 치우고 뭐 그런 거. 그런데 거기서 그 선임하사님을 만나게 된 거다. 다시 카투사로 돌아와 8군 사령부에서 원사로 근무하고 계셨다.

하~~ 그래서 좀 잘 된 꼴을 보여드려야 되는데 미군 부대에서 노가다나 하고 있는 꼴을 보여드리게 돼서 죄송했지만, 암튼 거기서도 주 1회 꼴로 그 선임사님께 끌려다니며 8군 용산 기지 곳곳에 좋은 곳은 다 돌아다녔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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