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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내탓이요"라는 신앙적 의미

내가 처음으로 성당에서" 내탓이요 내탓이요 내 큰탓"라는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를 못했다.이종교 저종교 방황 하면서 나는 조금씩 마음으로 다가온 대목이다.
성당에서 처음으로 미사를 볼때 나는 마음으로 이 말에 저항 하였다.
왜 내 탓이냐고요.
오히려 상대방이 더 잘못했다고 역설하고 떠들고 다녔다.
사람이 자신을 보지 못하면 대부분은 자신의 탓으로 보이지 않고 타인의 잘못으로 전가 시키고 자신을 합리화 시키려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자신을 보면서 자신의 탓의 의미가 가슴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가슴으로 느낀다는 것은 아픔과 고통 속에서 진정으로 낮아짐에서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교만에 빠져 낮아 진다고 생각하는 얼간이 족속은 자신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절대로 깨닫지 못한다.
낮아짐이란 몸과 마음이 가장 낮아질대로 낮아져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존재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해야 한다.
존재이유가 무엇이고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한 자신의 양심에 대한 대답을 찾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을 찾지 못한 자는 항상 내탓이란 언어의 의미와 삶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양심의 소리 즉 마음의 소리를 들을때 그때 깨닫게 된다.
가만히 따지고 보면 우리네 모든 삶이 나의 욕심에서 출발된다고 미루어 짐작한다.
그렇다.모든 것은 나로부터 나온것이다.
욕심의 근원이 타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슴속에서 나왔다는 가슴속 심연의 소리를 들으면 나는 나를 바라보게된다.
결국 욕심의 산물이 내가 원인이 되어 가정과 사회에 모든 악의 뿌리구실을 하니 나의 잘못이 크므로 내탓이란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런 연유에서 조절하고 통제하고 버리는 연습을 하게 되는 것이다.
참된 신앙인이란 모든것을 내탓으로 보고 상대방에게 접근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존재할때 진정으로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기도할 수 있다.
형식적인 절차와 생활이 일정부분 보완이 되겠지만 진정으로 회개와 반성이 없으면 신앙적 개선의 여지는 없다.
진정으로 내탓임을 인정할때 내 잘못을 수정하려는 동기가 생기는 것이다.
당신이 진정으로 변하려면 원인을 타인에게 찾을 것이 아니라 자신부터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내탓이요"라는 신앙적 해석은 10수년의 아픔으로 건져낸 아파보고 엎어져서 인지하게 된것이다.
그리 자랑할 것은 못되나 타인에게 네탓으로 돌리는 모습부터 한번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자신의 반성과 회개가 없다면 참된 신앙으로 접근이 어렵게 되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