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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교수

<박사과정이란 무엇인가?>

1. 독일에 도착했을 때 머물 곳이 정해지지 않아 어느 한국분 댁에서 3주 정도 지냈다. 그는 재료공학을 전공했다. 그 역시 박사과정 학생이었다. 독일에서 학부(디플롬 엔지니어)까지 마친 분이라 독일어에 능숙했다. 재미있는 건, 그는 박사과정을 직장인처럼 했다. 매일 그는 7시반에 출근해서 4시에 퇴근했다. 3주 동안 그의 생활에 동기화해서 보내는 게 내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번은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박사하는 건 어려운일이 아니예요. 알고보면 개나소나 다 받을 수 있어요."

2. 그가 한 말은 그다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저 주어진 임무를 묵묵히 하다보면 언젠가 끝이 날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박사과정을 제대로 밟는 게 쉽다는 말은 아니다. 박사(博士). 이 말에는 많이 안다는 뜻이 담겨 있지만, 정작 박사과정에서 익히는 건 많은 지식이 아니라 생각하는 태도와 연구하는 자세다.

3. 생각하는 태도란 먼저 모든 걸 의심하고 비판하는 걸 뜻한다. 역으로는 내가 하는 모든 연구는 의심 받아야 하고 비판 아래 놓여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그 의심과 비판을 이겨낼 논리와 합리성을 익히는 것이기도 하니 모든 걸 의심하라는 건 논리와 합리적인 비판의식을 갖추라는 뜻이다. 이론물리학자 중에서도 이 비판에 관한 한, 흉내내기 힘든 분이 있었다. 볼프강 파울리다. 그가 오죽 비판적이었으면 "물리학의 양심", "신의 분노"라고 불렸을까. 물론 그는 당대 가장 뛰어난 물리학자이기도 했지만, 지나치게 비판적이라 몇몇 물리학자의 인생을 말아먹을 뻔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비판 정신 하나 만큼은 마음에 새겨둘 만 하다. 그러니까 생각하는 태도란, 그게 무엇이든 늘 의심하는 걸 뜻한다.

4. 나와 오랫동안 같이 연구한 분 중에는 우즈베키스탄 아카데미션 한 분이 계시다. 이분에게 새로운 내 아이디어를 말하면, 돌아오는 첫 대답은 늘 이랬다.

"노, 노, 노, 현철! 그건 말이 안 돼."

그리고 이어지는 건 으레 긴 토론이었다. 두세 시간을 토론한 뒤, 납득이 가야 받아 들이는 것, 그건 우리들의 일상이었다. 여기엔 겉치레 예의 따위는 없었다. 틀리면 틀린 거고, 마침내 타당하다고 여겨지면 받아들이는 것이다.

5. 그다음은 연구하는 자세를 익히는데 이 자세란 집요함과 끈기다. 처음 연구를 하다 보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지는 문제를 맞닥뜨린다. 박사과정 내내 반드시 해야하는 건 이런 벽을 혼자서 여러 번 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집요함도 생기고 끈기와 문제를 반드시 풀어 내겠다는 의지가 몸에 밴다.

6. 그래서 박사과정 학생에게 한번씩 하는 말이 있다. 네가 박사과정 동안에 겪는 문제를 극복하면, 네가 어디에 가든 난 그다지 걱정 같은 건 하지 않는다고. 그건 거기서 네가 무슨 문제를 만나든지 반드시 극복해낼 것이라는 걸 믿기 때문이라고. 그러니까 박사과정이란, 알고보면 사서 고생하는 기간이다. 그 고생을 다시 겪긴 싫지만, 뒤돌아보면 유익했다.

 

<친구(親舊), 그리고 동료(同僚)>

1. 친구란 오랫동안 친하게 지낸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살면서 친구를 가장 많이 사귀는 때는 초중고를 다니는 동안이다. 그때 사귄 친구들은 거의 평생을 간다. 대학교 때도 친구를 사귀기도 하지만, 고등학교 때 사귄 친구들보다 아무래도 친밀도가 떨어진다. 사회에 나오면 친구를 사귀는 게 조금씩 힘들어진다. 하지만 나이 들어서 친구를 사귀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다. 의기가 투합되면, 오히려 더 끈끈한 관계가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2. 내 옛 제자 중 한 명이 학생이었을 때 그를 데리고, 프랑스 학회에 갔다가 같이 독일에 있는 연구소를 방문했다. 유럽에서 이 친구와 한 달 넘게 같이 지내면서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한번은 같이 술을 마시면서 그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네가 졸업하고 나면, 결국 우리는 친구가 되는 거야."

그 친구는 감당할 수 없는 말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술을 마시다가 나와 그 옛제자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 논쟁에 익숙하지 않았는지 그 친구는 날 비난하며 흥분했다. 그 비난을 듣고 있다가 잠시 담배를 피우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그 친구가 또 이런 말을 하는 거였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난 아니, 그게 왜 죽을 죄야?라고 반문했다. 논쟁을 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런데 그 친구가 논쟁하다 내 앞에서 그리 흥분한 걸 보면 그 친구 마음 속에도 날 친구로 여기는 마음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이 친구가 지금도 나와 같이 일하는 옛제자다. 그가 어머니를 잃었을 때 내 마음이 정말 아팠던 걸 보면 그를 친구로 아끼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3. 물리학을 전공한 뒤, 같이 가장 많이 토론한 사람은 러시아 친구였다. 나보다 세 살 아래인 그 친구는 내게 선생이었고, 따바리쉬였고, 무협지 식으로 말하자면 의형제였다. 그는 내게 은으로 만든 작은 십자가를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러시아에서 누군가에게 십자가를 준다는 건 넌 내 형제라는 표식이야."

그날 우리는 의형제가 되었다. 그가 부탁하는 것이라면 난 늘 들어주었고,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뭐랄까, 그냥 든든했다. 한번은 그가 내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래서 내가

"형은 항상 네 편이야."

라고 했더니 그 형이라는 말은 싫다고 했다. 그에겐 형이 있었는데 이십여 년 전에 작고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형이라는 말을 싫어했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네 형이니 늘 네 편이 되어주겠다고 했다. 그제야 그는 아무 말 없이 내 말을 듣기 시작했다.

4. 러시아어에는 따바리쉬라는 단어가 있다. 북조선에서는 그 단어를 동무라고 번역한다만, 세상을 떠난 디아코노프 선생이 내게 그 단어를 설명해주었다. 그 단어의 기원은 네덜란드의 길드라고. 같은 길드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부를 때 쓰는 말이라고 했다. 그래서

"따바리쉬 디아코노프, 라고 하면 되는 거냐?"

라고 물었더니 웃으면서 그렇단다. 그날 이후 난 이 따바리쉬라는 단어가 마음에 쏙 들었다. 뼈속까지 물리학자라고 스스로 말하는 내가, 같이 물리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쓸 수 있는, 딱 안성맞춤인 단어였다.

5. 이 단어에는 동료애가 담겨 있다. 같은 업종에 종사하므로 마음이 통하고 쉽게 친구도 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동료였다. 난 이런 동료애가 같은 업종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있었으면 한다. 연구비 몇 푼 더 움켜쥐겠다고 동료까지 팔아먹지는 말자라는 말이다. 이 동료애가 좀 넘쳤더라면, 한국 물리학이 지금보다는 참 많이 발전했을 것 같다. 아쉬운 점이다.

6. 다시 친구라는 말로 돌아가 보자.

강미숙

선생님의 댓글이 내 눈을 밝혀 주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그 댓글 하나로 내 생각이 단번에 정리된 기분이 든다. 강선생님 말씀처럼 실제로 그랬다. 내 옛제자들이 박사를 마쳤을 때 난 그들이 더는 내 제자가 아니라 동료라고 관계를 늘 재설정했다. 반진담 반농담으로 이젠 서로 이름을 부르자고 말한 적도 있는데 그들이 그건 용납하기 힘들다고 했다. 아, 이놈의 존댓말과 반말 문화. 그래서 내가 찾은 답은 이것이다. 난 그냥 지금까지 생각한 대로 해온 대로 살아갈 것이라는 것. 남들이 뭐라 하든, 그건 그들의 문제지 내 문제는 아니다. 그들을 탓할 이유도 없다. 이제야 마음이 좀 편해 지는구나.

 

변명 2>

1. 사람을 이해하는 데도 텍스트와 컨텍스트를 구분해야 하고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게 하는 해석학이 필요한 건지 난 잘 모르겠다. 뒷담화가 내 귀에 들리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만, 이게 건너 건너 내 귀에까지 들리는 건 그다지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2. 부산대에 있으면서 다섯 명의 학생을 외국으로 박사과정 유학을 보냈고, 인하대에 와서도 또 여섯 명을 외국으로 박사과정을 하도록 내보냈다. 그곳 교수에게 학생을 개인적으로 소개하고, 추천서에 그 학생의 강점을 자세히 써서 보냈다. 내게서 석사과정을 잘 마치고 영어를 좀 할 줄 아는 학생을 외국에 내보낸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외국에 좋은 대학으로 유학을 가면, 좀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되고, 좀 더 많은 전문가를 만나 물리를 배울 수 있다는 점이 하나였다. 그리고 두번 째 이유는 학벌 세탁이었다. 아무래도 부산대나 인하대에서 박사학위를 하는 것보다는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하면, 학계에 남든, 취직을 하든 그게 더 나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3. 학생을 외국으로 내보낸 이유는 하나 더 있다. 내 경우, 원래는 미국으로 유학을 갈 생각이었다. 석사과정 동안에 GRE를 공부하고, 영어를 공부하면서 핵물리학을 잘한다는 미시간이나 워싱턴으로 유학갈 요량이었다. 그런데 석사과정 2년차 때 내 지도교수님은 독일로 유학을 가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하셨다. 지도교수님께서 연구원으로 계셨던 연구소에서 생활비를 받으며 공부할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었다. 나는 며칠 고민한 후, 그리 하겠다고 교수님께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독일에 가서 한 3년, 죽을 고생을 하며 박사학위를 했다. 그때 경험 때문에 학생들이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하면, 한국에 있을 때보다는 더 열심히 할 거라는 생각이 또 하나의 이유였다.

4. 석사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와 같이 논문을 쓴 친구들을 외국에 내보내는 것, 나 역시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2, 3년 공들여서 키웠는데, 이제 같이 연구하면, 좀 더 나은 연구, 좀 더 의미 있는 연구를 할 수 있지만, 그건 내 욕심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외국에 나가서도 잘할 친구들을 흔쾌히 외국으로 내보냈다. 물론 그 중 몇몇 학생들은 외국으로 나간 후에도 나와 같이 연구를 했다. 특히 오사카대학으로 유학을 간 학생들의 경우에는 그 지도교수와 같이 마음이 잘 맞아 같이 연구하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유학을 나간 학생 중 삼분의 이는 그곳에서 스스로 알아서 연구를 했다.

5. 그런데 최근에 들리는 말이 내가 논문 수를 늘리려고 학생을 외국에 내보냈단다. 아, 그렇게 여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잠시 나 자신을 살펴봤지만, 그건 내가 원래 생각했던 이유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런 말을 한 분들에게 해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불쾌하긴 했다. 이제 더는 학생을 외국에 보낼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코로나 때문에 그게 쉽지 않은 탓도 있지만, 더는 학생을 받을 생각도 없으니 만약에 외국에 내보내더라도 한 두 명 정도 더 보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지금 있는 박사과정 학생들을 외국에 내보낼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6. 박사과정을 직접 가르치니까 좋은 점이 하나 있었다. 그동안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연구를 이 친구들과 같이 할 수 있다는 것, 쉽진 않지만, 잘 끝내면 참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는 주제를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좀 더 기다려들 보시길. 아주 훌륭한 결과를 보여 드릴테니.

7. 선생이 늘 학생 편에서 생각한다는 것. 그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늘 내 자신을 살펴야 하는 건 맞다. 행여 내게는 사심이 없는지 말이다. 그리고 늘 하는 말이지만, 시선은 항상 저 먼 곳을 향해야 한다. 결국에 내게 남는 건 사람이니 말이다. 그러니 그런 뒷말이 내귀에 들리는 걸 날 다시 돌아보는 기회로 삼겠다. 그런데 말이다, 이 불쾌한 감정은 도통 사라지질 않는다. 역시 난 뒤끝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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