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아이들 뛰는 소리, 젊은이들의 환호, 바닷가를 따라 심은 소나무들이 숨쉬는 소리...
저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새는 누굴까? 한참 지저귀더니 멀리 날아가 버렸습니다. 끊임없이 부서지는 파도는 바다의 피부를 살짝 벗겨놓은듯 하얀 속살을 드러냅니다. 한번, 두번, 세번, 네번, 아무리 세어도 멈추질 않습니다. 시계가 똑닥거리듯이, 시간이 영원이 멈추지 않을듯이, 잠시 귀기울인 파도소리가 영원을 웅변합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가 떠오릅니다.
인연이란 참 뜻깊은 것입니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 미소 한번 건네거나 고맙다는 한마디를 건네는 것도 일상의 엑센트가 되지만, 책으로 만나거나 영화로 접하거나 혹은 전해들어 그 누군가를 알게되는 일은 종종 삶의 동력이 됩니다.
어느 시공간에서 우연히 '그'를 마주쳐 담소를 나누고 눈빛을 마주하고 초단위로 변하는 표정을 보고 거기 담긴 따듯한 마음이나 번뜩거리는 지성이나 감출수 없는 깊은 회한이나 이룰 수 없는 잊혀진 사랑이나 삶과 사람을 향한 타오르는 열정을 지켜보는 일은 정말 숨막히는 일입니다.
누구에게도 드러내진 않았지만,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말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시공간을 넘어 누군가를 흠모하는 일, 그 누군가가, 다이나마이트를 불렀다는 귀공자 같은 아이돌이거나, 러브어페어 영화를 보다 반한 아넷 베닝이거나, 톨스토이의 작품에 나오는 귀족사회에 안어울리는 귀족 레빈이거나, 별이 빛나는 밤으로 맞닥뜨린 고흐거나, 범이 내려온다는 새로운 음악과 불특정한 동작을 춤으로 선보이는 그룹이거나, 너털한 철학을 드러내는 리차드 파인만이거나 그리 큰 상관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 누군가를 흠모하는 건,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바라지 않는 일보다 고귀합니다.
인간의 모든 욕망은 지극히 부정적인 면이 강조되어 철저히 왜곡되고 덫이 씌워졌습니다. 아름다운 여인과 마주해 떠오르는 자연스런 호기심도 누군가는 수작으로 치부하기 쉽고, 삶을 추동하는 가치에 대한 열정도 누군가는 입신양명의 욕망으로 취급하고, 나라를 사랑한다는 굳은 결심도 누군가에겐 88년도 케케묵은 소리가 됩니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건, 철저히 해체되어 이제 그 흔적조차 남지 않은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때로는 종교의 이름으로 때로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그리고 때로는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정죄받는 모든 순수는 이제 이땅에서 사라져 버린듯, 잔인한 계절은 4월만이 아닙니다. 11월이 되었지만,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고 있지만 순수에 대한 모독은 마치 성추행을 당한것처럼, 황당함과 분노와 부끄러움과 후회와 좌절감을 낳습니다.
어쩌면 전쟁의 상황이 가장 극명하겠습니다. 적이 된 누군가와 인연이 생겨 그를 한 사람의 인격으로 대하는 일이 가장 극단적인 상황입니다. 배신과 반역의 위험을 무릎쓰고 그 누군가를 위해 호의를 베푸는 일. 그것은 비록 역사가 정죄하더라도 여전히 순수입니다. 기억과 욕망을 휘저어 봄비로 뿌리를 적시며 죽은땅에 라일락을 일궈 내듯 말입니다. 도대체 그 순수를 오염시킬 권리는 누구에게 있단 말입니까.
가장 순수한 것이 가장 아름다운 법입니다. 바다가 파도가 하늘이 새의 지저귐이 흔들리는 소나무가, 바람과 하늘이, 그렇게 아름다운 것은 순수를 파괴할 욕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 인간만큼 순수에서 멀어진 불행을 겪는 존재도 없습니다.
파도가 자꾸자꾸 단초들을 던져줍니다. 어쩌면 오랫동안 마주하지 않았던 그러나 내면에 깊숙이 쌓여있던 생각들이 호출되나 봅니다. 하루종일 파도와 속닥거리면 순수를 향한 열정이 조금이나마 수면으로 떠오를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