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사레 보르지아(Cesare Borgia), 음모, 부도덕, 탐욕의 종말]
체사레 보르지아는 본인의 이름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모델로 더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교황 알렉산더 6세인데, 순결을 요건으로 하는 카톨릭 사제의 최고 지도자였음에도 여러 명의 여성으로부터 10명 이상의 자녀를 두었고, 그 중 한 명이 체사레였으며, 모든 자녀들 가운데 체사레의 여동생인 루크레티아와 아울러 문학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가장 유명한 인물입니다.
체사레는 어려서부터 명석하고 눈치가 빠르기로 유명하여 아버지에 의해 그 자리를 잇는 종교가로 성장하도록 지원받아, 착실히 단계를 거쳐 나갔고, 18살의 어린 나이에 발렌시아의 추기경으로 선정되었으며, 교황 직속 군대는 체사레보다 두 살 어린 지오바니가 맡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교황이 독자적인 권위와 권력을 가지고 유럽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나, 교황이 지속으로 지배하는 영토(교황령)는 매우 한정된 상태여서 각 지역 군주들이 공물을 보내오지 않으면 예산 부족으로 인해 마음대로 사람을 부리거나 원하는만큼 사치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교황의 내연녀 중 한 명이자 지오바니의 어머니인 반노자 부인이 개최한 연회에 체사레와 지오바니, 루크레치아가 모두 함께 참석했다가 이튿날 지오바니가 처참한 사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누가 살인을 주도했는지에 대한 조사는 신중하게 진행되다가 갑자기 종결됐는데, 그 직후에 체사레가 사제직을 그만두고 발렌티노의 영주 겸 교황군의 대장으로 임명되면서 동생의 군사적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몰래 암살한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게 제시되었습니다.
이후 체사레는 이탈리아 각 공국에 대한 점령 활동을 시작했고, 자신이 살해한 동생의 처인 산차와의 내연 관계를 지속했으며, 자신의 여동생인 루크레치아와도 아이를 낳았고, 정복 활동을 방해하려는 사람은 자신의 혈육이라도 독약을 타서 암살해 버리고, 전쟁 중 화친을 제안했다가 동맹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찾아온 상대방을 붙잡아 살해하기도 하는 등 이탈리아 전역에 불안과 공포를 심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체사레가 휘두르는 폭력의 뒷배경인 아버지 알렉산더 6세가 사망하고, 체사레의 잔인한 점령 행위를 반대하는 교황 줄리어스 2세가 즉위하자 정복지에서 순차로 반란이 일어났고, 적은 수의 교황군으로 다수의, 많은 군대를 거느린 각 공국의 저항을 당해 내지 못하여 여러 차례 체포와 탈주를 거듭한 상태에서 결국 전투 중 창에 찔려 사망하게 되었는데, 당시 체사레는 31살의 어린 나이였고, 아버지 사망 후 5년을 넘기지 못하고 멸망한 것이었습니다.
보르지아 가족의 이야기는, 지도자의 타락, 권모술수의 양상과 결과, 성도덕의 문란, 폭력에 의한 지배가 종말에 이르는 과정을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흥미진진한 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혈육들까지 죽여가면서까지 잔인하게 폭력적, 세속적 권력을 추구했던 젊은이가 결국 스스로 급속히 무너지는 과정에서, 칼잡이는 뒷배경에 의한 응원 없이는 바로 허물어지는 모래성에 불과하다는 역사정 교훈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4년 전 이맘때 한 방송국에서 태블릿 PC를 입수했다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그 방송국 관계자가 역술인을 대동하여 한 젊은이를 만났다는 보도도 있습니다.
그 방송국에서 그 젊은이에 대해 요즘 약 4년 전 이맘때와 유사한 태세를 보이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체사레 보르지아의 교훈이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