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검찰 – 대한민국 검찰은 어떻게 민주주의의 적이 되었는가
참여정부를 겪은 검사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올릴 때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라며 몸을 부르르 떨었을 거야.
무오류신화와 검찰지상주의에 젖은 그들은 검찰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대통령이 괘씸했던 거지. “검사와의 대화”에서 끝간 데 없는 저열함을 드러낸 것은 그들 자신이었지만, 당시 모두가 그러했듯이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라고 했을 것이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해 주겠다는, 그래서 검찰에 신세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선언한 대통령 따위 고까웠을 거야. 검찰을 통치의 파트너로 여기는 정권으로부터 협력에 따른 보상을 받는 게 그들에게는 남는 장사니까.
2008년 말 어느 기자가 2003년 3월 “검사와의 대화”에 참여했던 검사들을 찾아 연락해 보았어.
그랬더니 그들은 “현 정부에서 참여정부 시절 위축된 검찰의 권한을 되찾아야 한다”거나 “법질서 준수를 강조하는 현 정부가 더 믿음직스럽고 마음이 놓인다”고 말해.
그런데 2008년 한 해 동안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 참석자들의 대거 기소, 광우병 보도와 관련한 ‘PD수첩’ 사건 및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에 대한 수사가 이어졌어. 그 해 8월 KBS 정연주 사장은 조세소송에서 법원의 조정권고를 받아들이고 소를 취하했다는 이유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위반죄로 기소되기까지 했지.
국민들은 이명박 정부의 집권 1년여 만에 검찰을 이용한 MB식 공포정치의 시작과 민주주의의 퇴행을 감지했지만, 검사들은 참여정부 5년의 악몽을 떨쳐내고 본래의 길로 회귀한 것이 편안했던 것 같아.
자 그럼, 통치에 협조한 대가로서 검찰 조직이 받는 대가는 무엇일까?
검찰에 신세를 진 정치권력은 검찰 조직을 건드리지 못하고 그들의 자치공화국을 인정해 주게 되는데 말야, 그럼 그 내부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보기로 해.
2009년 9월 수감자를 157일간 불법구금시킨 검사가 달랑 견책의 징계를 받아.
집행유예의 선고를 받은 자가 유예기간 중에 다른 죄로 실형을 선고받아 그 판결이 확정되면 이전의 집행유예 선고는 효력을 잃고 징역형을 그대로 살아야 하거든. 그런 경우였는데, 검사가 해당 수감자의 1심 판결문만 검토하고 항소심 판결문을 확인하지 않아서 구금기간을 잘못 계산한 거였지.
피디수첩에서 보도한 “검사와 스폰서” 편에서 다뤄진 어느 검사는 정용재 씨로부터 향응을 제공받은 것 말고도, 2010. 1. 22. 부산지검 공판부 검사들에 대한 향응접대 내역이 기재된 고소장을 배당받았는데 조사도 없이 곧바로 각하처분을 해. 자신과 동료들이 관련된 사건을 각하로 셀프처리한 건데, 2011년 4월 겨우 감봉 2월의 징계를 받아.
검찰이 자기 식구를 직무유기죄로 수사, 기소할 리 없지 않겠어?
마지막으로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정관계 로비 사건에서 1997년부터 12년간 박 전 회장의 비서로 근무한 이모씨가 작성한 다이어리와 탁상달력은 대검 중앙수사부의 수사 과정에서 정·관계 인사들의 '살생부' 역할을 했는데, 유독 검사들만 이를 피해가지.
그 비서의 탁상달력에는 여러 검사의 이름이 올라 있는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지만, 기소된 검사는 김종로 부산고검 검사가 유일했어.
재미있게도, 공판 진행 중에 공소사실에 포함되지 않은 별도의 금품수수 사실이 있다고 밝힌 것은 김 전 검사의 변호인이었어.
그 변호인은 증인으로 나온 박 전 회장에게 “2006년 7월 김 검사와 골프를 친 뒤 저녁식사를 마치고 5000달러를 전달하지 않았느냐”고 물어 보았지. 김 전 검사는 2005년과 2007년에 각 5000달러를 받은 혐의로만 기소되었거든.
오히려 공판검사는 변호인에게 “기소되지 않은 범죄사실을 묻고 있다”며 반발하고, “왜 기소하지 않았냐”는 재판장의 질문에는 “대가성이 있는 게 아니라 일반적 용돈이었다”고 답했어.
김 검사 또한 평소 여러 차례 용돈 및 전별금 명목으로 현금과 달러를 받았지만, 청탁의 대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추가의 금품수수를 자발적으로 밝힌 거라고 했지.
한편 정권에 협력하면 인사로 보상하겠다는 약속이 확실하던 그 시절에 검사들은 사건을 만들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했어.
2008년 말에 법질서를 존중하는 이명박 정부가 더 믿음직스럽다고 했다는 그 검사는 아마도 지금은 “그 시절에는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겠지만, 이건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정도가 아니지.
한명숙 전 총리의 정치자금법위반죄 사건을 보기로 해.
한 전 총리 사건 수사와 관련해 검찰이 처음으로 부른 사람은 한만호씨가 운영하던 건설회사 한신건영의 임원 남모씨였어.
남씨는 "처음으로 검찰에 간 것은 2008년 4월 2일이었지만 가기 전에 여러 차례 검찰에서 전화가 왔다"며 "그날 저녁 6~7시에 강남 메리어트호텔 커피숍에서 검사 1명과 계장 1명을 만났다"고 법정에서 말해. 이어서 "나도 안 만난다고 피했다가 수차례 전화가 걸려와서 4월 2일 만난 것"이라고 답변했어.
한편 한만호가 진술을 바꾸자 곤란해진 수사검사는 심장병으로 입원해 있는 한 전 사장 어머니를 꽃다발을 들고 찾아가 “아드님이 진술을 번복해서 빨리 나오기 어렵게 됐다”고 얘기했지.
마지막으로, 해당 사건의 5차 공판기일에는 검찰측 증인인 한신건영의 전 경리팀장 정모씨가 나왔거든.
검찰은 해당 증인이 작성한 이른바 “채권회수목록”상의 ‘의원, 3억 원 지출’이란 기재가 한명숙 전 총리에게 3억 원을 전달했다는 유력한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었어.
그런데 문제는 목록의 군데군데 수기로 기재한 숫자들이 있었는데, 목록을 작성했다는 증인조차 명확히 설명을 하지 못한 데다가 몇몇 수기 부분은 수사검사들이 적어 넣은 것이라고 실토했어. 심지어 채권회수목록을 작성하기 위해 참고한 데이터베이스의 엑셀파일 원본은 잃어 버려서 없다고도 하지.
여튼, 수사검사들이 호텔이야 병원을 쫓아다니고 증거까지 직접 가필하시고 사활을 걸었던 거지.
검사들은 이제까지 정치권력이 자신을 독립시켜 주기만 하면 검찰이 바로 설 수 있다고 주장해왔지만 말이야, 정치권력의 도구로 쓰이던 오랜 관성이 검찰을 비틀어 놓았다고 봐. 검찰 조직 자체가 독자적인 권력집단화되고, 법과 원칙이 아니라 힘을 지향하게 된 거지.
이렇게 해서 대한민국 검찰은 정치검찰을 넘어 검찰정치를 하면서 선출된 권력을 위협하고 민주주의의 적이 되게 된 것이지.
그래서 마지막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저서 “운명이다”에 담긴 이 말을 아프게 되씹어보는 거야.
“검·경 수사권 조정과 공수처 설치를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스러웠다. 이러한 제도 개혁을 하지 않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려 한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퇴임한 후 나와 동지들이 검찰에 당한 모욕과 박해는 그런 미련한 짓을 한 대가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