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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

"다른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가는곳, 거기서 나는 멈춰 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귀 중의 하나이다. 비트겐쉬타인의 말이다.

선사들이 하는 말과 약간 비슷하다. 정신 차렷! 꿈 깨! 고만!

멈춤 혹은 정지하는 힘, 이것이 있을 때 휩쓸리지 않는다. 무리에 휩쓸리지 않고, 광기에 말리지 않고, 유행에 감염되지 않는 것.

일종의 판단중지를 말하는 것 같다. 멈추어 서는 데 머무르지 않고, 다른 선을 긋고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 탈주, 다르게 보기, 삐딱하게 보기, 거꾸로 보기, 다시 보기, 첨부터 다시 보기가 필요한 것이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속는다. 우리를 속이는 것들, 권력과 자본과 언론과 SNS와 엉터리 교사들과 광대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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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쉬타인은 글쓰기와 예술에 대해 참 많은 말을 했다.

- 예술가는 자기가 글을 쓰면서 느끼는 것을 다른 사람이 읽으면서 느끼기 원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미 처음부터 완전히 헛소리다.

- 예술작품은 <다른어떤것>을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전하려 한다.

- 논리적 추론의 규칙은 언어 게임의 규칙이다.

- 시의 정점은 지성의 뾰쪽함이 충심(衷心)으로 옷 입혀지지 않고 노골적으로 드러난다면 너무 뾰쪽해진다.

- 조악한 문장처럼 보이는 것이 좋은 문장의 씨앗일 수 있다.

- 내가 시를 쓸 수 없듯이, 나는 산문도 단지 그만큼밖에, 더는 쓸 수 없다. 나의 산문에는 아주 일정하게 한계가 놓여있고, 나는 내가 시를 쓸 수 없는 만큼이나 그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나는 그렇게 장치되어 있다. 오직 이 장치만이 나에게 이용 가능하다.

비트겐쉬타인은 스스로 산문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진정으로 추구한 것은 시였다. 그리고 철학은 시처럼 쓰여져야 한다고 말한 것 같다(어디선가 읽었는데 찾을 수 없다). 사실 그는 명제적 표현을 주로 사용하고 명징하고 간결한 글을 주로 썼다. 그가 남긴 아포리즘들은 깊고 아름다우며, 우리의 사유와 마음을 맑고 명료하게 한다. 그리고 깊은 데로 데리고 가는 것 같다.

현대철학자들도 문학적 메타포를 아낌없이 사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의 지성만이 아니라 우리의 몸과 감각에 어떤 울림을 던져주고 있다. 시는 그런 것이다. 은유가 조성시켜주는 다의적 의미와 느낌과 흔적은 글에 어떤 '비밀' 혹은 '신비'의 차원을 남겨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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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어느 시인님을 만나 오래 대화하였다. 그분 말씀으로 우리나라에 시인의 수가 6-8만명쯤 된다고 한다. 1990년대 이후 온갖 문예지와 대학의 문창과가 유행하여 시인들을 양산하였다고 한다. 압구정동 어느 아파트에는 각 동마다 시인이 5-10명이 된다고 한다. 동네서 하는 문화센터에서 몇 개월 시창작법 배우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예지에 함께 시를 올리고 서로 시인이라고 불러주고, 시인으로 등단했다고 한단다. 시와 시인이라는 직함을 엑세서리로 하는 그런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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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인님이 나에게 아주 통렬한 말씀을 던지셨다. 시는 모든 글들 중에 최정점에 있는 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비트겐쉬타인이 생각났나 보다.) 흔히 산문 스타일의 사람이 따로 있고, 운문 스타일의 사람이 따로 있으며 산문 스타일의 사람은 시를 쓸 수 없거나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들 하곤 한다. 은유와 환유의 세계가 전혀 다른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그분은 글의 기본 근력을 지니지 않은 사람이 시를 쓰면 안된다고 한다. 시를 쓰는 사람은 산문도 쓸 수 있어야 한다고 조차 말하셨다. 여튼 글의 기본기조차 없는 사람들이 쓴 시가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의 형식을 지닌 글이라고 다 시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던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학습과 기본적인 글공부와 시쓰기는 함께 가야한다고 하였다.

출판인들이나 문학가들 사이에서는 우리나라에 시인의 수를 아주 소수로 본단다. 그럼 나머지 대다수 시인은 시인이 아니란 것인가? 물론 시인이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시를 쓰는 사람들이자 시의 독자들이기도 하다. 저마다의 아름다운 시로 사람들의 마음을 만지고 마음의 생태계를 풍요롭게 하고 있다. 하지만 나 역시 아무나 시인이 되는 것에는 그리 동의하지 않는다. 그 시인님이 진정한 시(시인)의 범주를 너무 좁게 잡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얼핏 들기도 하였지만, 그런 태도와 철학은 참으로 좋다고 생각한다. 글의 정신, 시인으로서의 소명, 시철학 같은 것이 느껴지지 때문이다. 가볍게 글을 쓰고 기교만 익히고 말장난하고 자기 판매에 능숙한 것이 요구되는 시류를 거슬러 온 몸과 온 삶을 던져 글을 쓰고, 자신을 녹여내어 글을 쓰고 살아가는 그분의 삶을 느끼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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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쉬타인은 철학자이지 시인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시를 남겼다. 그가 쓴 <문화와 가치>라는 책에 보면, 마지막 글을 시로 맺는다.

"그대 내게 진실한 사랑의

향기로운 베일을 던지면

그 두 손의 움직임에

그 두 다리의 부르러운 움직임에

영혼은 얼이 빠져 버려요

~중략~

누가 짰나요, 당신 발을 감싼 베일

바람결처럼 우리를 부드럽게 만지네요

부드러운 바람조차 당신의 종복인가요?

그것은 거미였나요, 누에였나요?"

* 시란 번역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나 번역되기 어려운 것이므로 위 글로 비트겐쉬타인의 시를 평가하지 마시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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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튼 우리의 글은 무엇을 추구하여야 하나? 글 쓰는 이는 아름답고 지고한 글을 쓰고자 하고, 아울러 널리 읽혀지는 글을 추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시공부를 생각하고 준비하고 있는 중이라 갑자기 이런 글을 올리게 되었네요. 좋은 밤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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