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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석

0104. 하느님, 마음, 헤아림

고대부터 현대까지 철학자들은 “진리가 있다”는 말을 자주 썼다. 나아가 “영원한 진리가 있다”, “절대 진리가 있다”, “궁극 진리가 있다” 따위 말을 썼다. 하지만 낱말 “있다”는 조심해서 써야 한다. “있다”는 좀 어려운 말로 “존재한다”, “존속한다”, “실재한다”, “실존한다” 따위로 달리 쓴다. 철학자들은 예컨대 영어 낱말 “이그지스트”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이그지스트”에서 “이그즈”라고 읽히는 부분은 본디 “바깥”을 뜻한다. 이 때문에 “이그지스트”는 본디 “바깥에 있다”를 뜻한다. 여기서 “바깥”은 “마음 바깥”을 뜻했다. 누구의 마음인가? 하느님 마음이나 사람 마음이다. 생각만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바깥에 실제로 있는 것을 두고 말할 때 “이그지스트”라 한다. 이 때문에 “이그지스트”를 한자로 “실”을 써서 “실존한다”로 옮긴다. 진리는 실존하는가? 과학의 진실은 실존하는가?

한 물리학자는 자연의 법칙이 마치 바위처럼 거기에 실존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오늘날 “바깥에 있다”라고 하면 “물리 시공간 안에 있다”를 뜻한다. 볼차노, 프레게, 러셀, 포퍼는 참인 명제들이 물리 시공간 바깥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에 따르면 그것들은 어딘가에 있다. 우리가 “마음” “지성” “이성”이라 말하는 것은 진실들이 놓인 자리를 말한다. 만일 사람 마음에 진실이 놓여 있다면 오직 몇몇 진실들만이 놓여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모든 진실이 놓인 자리가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마음일 것이다. 이를 가장 철저하게 따져 묻고 성찰했던 이는 데카르트다. 그는 알길을 찾는 과정에서 “모든 참말은 하느님의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과학의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것이 그의 《성찰》이 말하고자 했던 바다.

1619년 23세의 데카르트는 독일 울름 가까운 작은 마을에서 모든 과학의 바탕을 찾는 꿈을 꾸었다. 그것을 찾으려면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어디까지 알 수 있는지를 알아야 했다. 그는 자기 능력껏 감각기관, 상상력, 기억의 생리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는 몸의 신경생리 작용이 우리 판단이 옳다는 것을 판가름해주는 기준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그는 1628년쯤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을 쓰는 일을 스스로 그만두었다. 그래도 그는 자기 기획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같은 해 가을 아우구스티누스 연구자인 베륄 추기경을 만나 새로운 길에 들어섰다. 이윽고 1637년 《이성을 올바르게 이끌어 과학들에서 참말을 얻는 방법 이야기》를 프랑스말로 썼다. 이를 줄여 《방법서설》이라 한다. 프랑스말로 써진 이 책은 프랑스 철학의 시작이 되었다. 그는 물체는 오직 퍼져 있는 것으로 기술해야 한다는 자연과학 방법에 이르렀다. 이 방법으로 얻은 굴절광학, 기상학, 기하학 연구 결과를 길게 덧붙였다. 기하학을 다룬 곳에서는 근대과학을 연 ‘좌표계’를 선보였다.

데카르트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배운 것은 무엇인가? 만일 하느님이 세계 곳곳에 펴져 있거나 모든 사물에 스며들어 있다면 그는 나쁜 일이 저질러지는 곳에도 있어야 하지 않는가? 이 물음은 아우구스티누스를 괴롭혔다. 그는 이 물음을 풀려고 하느님은 공간에 펴져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느님을 퍼져 있지 않은 것으로 여기자마자 마음과 생각은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하느님은 모든 참말을 생각하는 마음이다. 하느님은 공간에 놓인 물체들과 몸들을 세고 거기서 일어나는 일들을 헤아린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하느님은 셈과 헤아림을 낳는 힘이며 모든 참말의 샘이자 잣대로 나타났다. 하느님은 수학과 과학의 원리였다. 그는 순수한 생각이며 모든 참말의 모둠이며 궁극 진리다. 사람 마음은 궁극 진리의 빛 아래 흐릿하고 어렴풋이 세고 헤아린다. 하느님과 사람 마음은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아니라 표준 도량형과 측정대상의 관계다. 하느님이 모든 참말의 잣대라면 사람 마음은 그 잣대에 따라 재어지는 생각 덩어리다. 그 생각 덩어리의 일부는 참이고 일부는 거짓이다.

데카르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성찰로부터 모든 과학의 바탕이 되는 두 원리를 얻어냈다. 첫째, 사람 마음이 파악하는 참말들은 퍼져 있지 않은 것의 자리에 놓여 있다. 이것은 “나는 생각하는 이로서 있다”나 “마음과 몸이 다른 실체를 이룬다”는 말로 표현된다. 이는 앎의 주체는 좌표계 안에 그릴 수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둘째, 모든 참말의 샘이 있고 그 샘에서 참말들이 흘러나온다. 이것은 “내가 밝고 뚜렷하게 갖는 생각들은 참이다”나 “착한 하느님이 저기 바깥에 참말로 있다”는 말로 표현된다. 생각하는 이가 가진 밝고 뚜렷한 생각은 모든 참말의 샘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데카르트는 자기 생각을 다듬어 1641년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에 두 원리가 뜻하는 바를 더 꼼꼼하게 드러냈다. 이 책을 짧게 《성찰》이라 하는데 처음에 라틴말로 썼다. 《성찰》의 초판에 “여기서 하느님이 바깥에 계시다는 것과 사람의 마음이 사그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 보인다”라는 문장이 책 제목에 덧붙여 있다. 프랑스말로 옮겨진 1647년 판에는 “여기서 하느님이 바깥에 계시다는 것과 사람의 마음과 몸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밝혀 보인다”가 덧붙여 있다. “사람의 마음과 몸이 서로 다르다”와 “하느님이 바깥에 계시다”는 과학의 두 원리를 달리 나타낸 문장이다.

이처럼 데카르트는 참말들이 몸이나 골 또는 머리 안에 있지 않고 마음 안에 있다는 이 원리가 모든 과학의 바탕이라 믿었다. 그에게 “참말은 마음 안에 있다”는 “마음은 참말을 알아챌 수 있다”를 달리 표현한 말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데카르트의 몸 마음 이원주의를 비웃고 업신여긴다. 그의 본디 뜻을 잘 살펴본다면 그가 왜 그것을 모든 과학의 바탕으로 여기겼는지 이해할 것이다. 데카르트는 모든 참말이 흘러나오는 모든 참말의 샘 또는 모든 마음의 샘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볼차노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데카르트의 이 생각 방식을 따랐다.

마이농, 프레게, 러셀, 포퍼 등 볼차노의 후배들은 과학이 참인 명제로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받아들이면서 명제들이 참말로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명제는 도대체 무엇으로 이뤄져 있느냐는 물음과 명제는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는 물음은 후배들을 내내 괴롭혔다. 이 야릇한 물음에 답하기 워낙 어렵다 보니 볼차노의 연구는 하나의 반대 흐름을 낳았다. 이 흐름은 “심리주의”라 불리는 것인데 이는 “신경생리주의”나 “물리주의”라 불려야 마땅하다. 물리주의를 부드럽게 표현한 이름은 “자연주의”다. 신경생리주의자들은 “생각 안”이나 “마음 안”을 “몸 안” “머리 안” “골 안” “신경에서”로 이해한다. 그들에게 명제는 골 안 신경에서 벌어지는 일을 나타낸다. 그들은 머리 안과 자연에서 벌어지는 것 사이의 관계 덕분에 참말이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제리 포더, 프레드 드레츠키, 처칠랜드 부부, 루스 밀리컨 등은 오늘날 이 흐름의 대표자다.

볼차노를 따르는 이들은 신경생리주의에 반대하거나 보완하면서 두 갈래로 갈라졌다. 이는 나중에 유럽과 영미 현대철학의 가장 중요한 두 갈래가 되었다. 하나는 브렌타노를 거쳐 후설로 이어지는 현상학 연구다. 다른 하나는 프레게를 거쳐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으로 이어지는 분석철학 연구다. 현상학은 “마음 안”의 뜻을 더 깊이 따져 물었고 분석철학은 명제의 “있음”을 더 깊게 따져 물었다. 이 두 전통이 신경생리주의에 만족하지 못했던 까닭은 이 견해가 과학의 가능성 자체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콰인은 신경생리주의만을 철저하게 밀고 갔을 때 우리가 회의주의에 빠져들 수밖에 없음을 잘 보여주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주류 전통 철학은 무엇이 참말인지 알 수 없으며 우리 사람이 참말을 얻을 수 없다는 회의주의를 이겨내려고 애썼다. 초기 현상학과 초기 분석철학도 이 철학 전통에 참여하면서 도대체 과학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엄밀한 철학으로 설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후기 현상학과 후기 분석철학은 그 전통에서 차츰 벗어났다.

나는 볼차노, 프레게, 타르스키, 데이빗슨의 연구 노선을 따른다. “샛별은 개밥바라기다”와 “샛별은 샛별이다”는 둘 다 참말이지만 둘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둘의 뜻이 다르다는 점이다. 이렇게 프레게는 문장이 뜻을 가져야 하며 문장의 뜻이 곧 명제임을 또렷이 드러냈다. 만일 문장이 뜻을 표현하지 못한다면 참말들은 모두 똑같아질 것이다. 타르스키는 “참이다”라는 개념과 문장들 사이의 논리 관계를 써서 문장들의 뜻을 나타내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것은 문장의 뜻 곧 명제가 어디에 있느냐는 물음을 조금 더 쉽게 풀 길을 마련했다. 데이빗슨은 “참이다”가 모든 말과 생각의 뿌리자 바탕이라는 볼차노 프레게 타르스키의 전통을 따랐다. 나아가 그는 볼차노와 프레게 및 러셀의 오류를 잘 간파했다. 그것은 참인 명제들이 어딘가에 있다는 착각이다. 그는 이 착각이 헤어나올 수 없는 미로로 우리를 이끈다고 경고했다. 데이빗슨이 내놓은 해법은 참말들이 내 마음이 다른 이와 세계 사이에 관계 맺는 방식에 있다는 것이다. 그 관계는 물리 상호작용을 뜻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하면서 이것이 마음 현상을 만들어낸다고 보았다.

마음은 무엇이며 마음은 참말로 있는가? 내 생각에 마음 역시 “있다”거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물음은 명제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물음만큼 우리를 헤어나올 수 없는 웅덩이에 빠뜨린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데카르트에게 하느님 마음이든 사람 마음이든 마음은 참말과 거짓말을 가려 앎을 얻는 힘이다. 만일 누군가 참말을 알게 된다면 그는 마음을 갖는 셈이다. “우리는 명제 X를 알 수 있다”를 “우리 마음은 명제 X를 품는다”라고 달리 말할 뿐이다. 앎을 찾아내는 마음을 다른 말로 “이성” 또는 “지성”이라 한다. 우리가 마음을 갖는다는 말은 우리가 이성을 갖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이성을 갖는다는 말은 우리가 헤아리고 추론하고 알 수 있다는 말일 뿐이다. 마음이란 곧 헤아리는 힘 또는 헤아리는 일이다. 20201029 클라라

<과학 방법> 또는 <알길>

0100. 명제

0200. 추론

0300. 측정

0400. 해석

0500. 과학들

0600. 과학철학들

0100. 명제

0101. 과학은 앎들의 짜임이다.

0102. 과학은 명제 꾸러미다

0103. “참” 개념은 “명제” 개념을 앞선다

0104. 하느님, 헤아림, 마음

0105. 과학은 믿음들의 짜임이다

0106. 나 혼자서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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