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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교수

<한국 일정, 나의 ‘원대한’ 계획 >

1. 11월 23일, 텍사스의 달라스-포트워스(DFW) 공항을 떠나 약 15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면 11월 24일 오후에 한국에 도착한다. 도착해서 2주간의 자가격리할 공간을 여러 곳 찾다가, 연희동에 있는 원룸으로 결정하고서 비용도 결제했다. 궁금한 것을 묻기 위해서 보건소나 격리공간 등 한국 곳곳에 여러 번의 전화 통화를 하고 나니 서서히 한국에 가는 것이 실감 난다. 이렇게 2주 자가격리를 해야 하는 상황은 이전에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당연한 것이어서 이의 제기할 필요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통과의례가 되었다.

2. 작은 방에서만 지내야 하는 2주 자가격리는 내게 어떠한 경험을 하게 할까. 이런저런 상상을 해 보지만,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상상 속에 있을 뿐이다. 미국에 있을 때 나는 주로 집에서 작업한다. 그렇지만 자발적으로 외출을 안하는 것과 못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다르다. 감옥생활처럼 할 것인가, 아니면 나의 일상세계로부터 뒤로 물러나서 가장 기본적인 조건만 갖춘 공간에서 중요한 것들에 집중할 특별한 기회로 만들 것인가는 오로지 나에게 달려있다.

3. 지난여름 모든 여행 일정을 포기해야 했다. 지난 봄학기 연구 학기의 일부를 한국에서 보내고서 3월초에 미국으로 들어왔으니, 거의 9개월만에 한국을 간다. 그동안 여름과 겨울에 한국에 가곤 했는데, 갈 때 마다 이런 저런 강연들이나 모임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번 겨울 일정은 내가 한국에 갈 수 있는가를 확정할 수 없기에 강연 요청을 수락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겨울 한국 일정은 여러 점에서 매우 특별하다. 이전에 없었던 자가격리를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전과는 달리 매우 느슨한 스케줄을 가지고 나의 시간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원대한’ 계획이 들어서는 지점이다.

3. 내가 작업하면서 가끔 왼쪽 모니터에 틀어 놓곤 하는 한국 프로그램이 있다. 한국의 재래시장이나 시골 동네 그리고 여러 산 들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다. 서울만 해도 무수한 전통시장이 있다는 것을 나는 이 프로그램을 보기 전까지는 몰랐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서울만 해도 가 보고 싶은 전통시장이 20여 개가 넘는다. 텍사스는 남한 면적의 7배가 되는 주이다. 미국에 처음 학생으로 살기시작하면서 한국과 독일에서 가졌던 땅의 크기와 공간개념이나 ‘가깝다’ 또는 ‘멀다’와 같은 거리개념을 근원적으로 바꾸어야만 했다. 더구나 텍사스는 모든 것이 ‘크고 넓다’고들 한다. 텍사스에 15년째 살고 있지만 내가 아는 곳은 대학이 있는 포트워스이며, 달라스도 간혹 미술관을 가거나 대학에 강연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가지를 않기에 잘 모른다. 다행스럽게 이 포트워스에는 대학에서 10분여 거리에 여러 개의 미술관들이나 연주홀들이 있고, 또한 대학내에 다양한 음악회나 연극, 발레 공연 등의 프로그램들이 있어서 문화적 갈증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샌 안토니오나 휴스턴 또는 오스틴과 같은 어떤 특정한 도시를 방문하고 싶어도, 최소한 서너 시간 이상을 운전해야 하니, 시간 여유가 없어서 그런 모험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한국은 모든 것들이 가까운 거리 안에 있으니, 시간을 내어 의지와 호기심만 있다면 다양한 것들을 경험할 수 있다.

4. 예기치 않았던 이러한 특정한 상황 때문에, 어쩌면 나의 생애에 처음으로 ‘원대한’ 계획을 하기 시작한다. 이번 겨울 방문에서 최소한 충무로의 인현시장, 경동시장, 종로 5가 먹자골목과 광장시장 등 서울에 있는 여러 곳의 전통시장들을 가보고 싶다. 곳곳의 재래시장에서 파는 음식들을 모두 맛보려면 아무래도 하루에 4-5끼 정도는 먹어야 할 것 같다. 11월1일부터 개방한 청와대 뒤편 북악산 길도 걷고, 그 북악산과 연결된 여러 산 하이킹도 하고 싶다. ‘서울 둘레길/ 북한산 둘레길’도 걷고 싶다. 거의 매일 1시간여 걷고 있으니, 옛날보다는 ‘몸 실력’이 훨씬 향상되었을 것이라는 약간의 자신감이 생겨서 이러한 계획도 해 본다.

5. 또한 내가 가보지 못했던 서울 동네들의 작은 골목 길들을 여기저기 걸어 다니고 싶다. 성동구 성수동에 있다는 어느 지하 재즈카페에도 기웃거려보고, 작은 동네 책방에도 들어가 보고 싶다. 하루 종일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작고 예쁜 베이커리 카페에 들어가서 맛난 빵과 커피 한잔 놓고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한참동안 바라보며 노트도 끄적거리며 온 종일을 보내고도 싶다. 비원도 가고, 크고 작은 미술관, 이런저런 연주회나 전시회, 연극, 뮤지컬도 즐기고 싶다.

6. 서울을 훌쩍 벗어나기도 해야겠다. 제주도를 제외하면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거의 모든 곳을 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가. 경부선, 호남선, 경춘선 기차나 고속버스를 타고서 가 보고 싶은 도시를 가서 바다와 들판과 산도 맘껏 보고 싶다. 면적이 참으로 작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비슷하게 또한 다르게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가를 머리로만이 아니라, 나의 눈과 손으로 경험하고 싶다. 물론 나의 원대한 계획에는 사람과 만나는 일을 빼놓을 수 없다. 만나야만 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만나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싶다.

7. 이렇게 하고 싶은 일들을 생각에 따라 열거하고 보니, 참으로 ‘원대한’ 계획이다. 한국 방문을 계획할 때마다, 대부분 강연 일정과 출판 관련된 일정이 주된 부분이었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가 이번에는 이전에 없었던 ‘사치스러운’ 상상과 계획을 하게 한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나의 이러한 리스트 중에 얼마만큼 실행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원대한’ 계획을 우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나의 호기심 레벨은 높아지기 시작하고, 지금 매일 마감일들과 씨름하고 학교일 들로 복잡한 과제들을 해내며 바쁘게 지내는 이 시간의 무게가 가벼워지기 시작한다.

8. 나는 이제까지 한국에서 앱을 사용해서 배달음식을 주문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자가격리 중에는 배달음식으로 살아야 한다고 한다. 배달음식 앱 사용하는 것도 이제 배워야 하고, 내게는 익숙하지 않은 여러 가지 구체적인 생존전략을 배워야 한다. 생존하기 위한 초보 단계에 있는 사람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일들을 하나하나 배워야 한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살아감이란 이렇게 크고 작은 것들을 배워야 하는 사건임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기억하는 것 보다 상상하는 것을 훨씬 좋아해요.” 앤 (Anne)의 말이다. 나의 원대하고 사치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이 계획을 하면서, 인간에게 상상력이 없다면 이 살아감이란 얼마나 척박하고 건조할 것인가를 상기하게 된다. 이미 나는 나의 야망찬 계획을 즐기기 시작한다. 이제 어디까지가 ‘상상만의 계획’인지 ‘현실적인 계획’인지의 경계를 긋는 것은 별로 큰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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