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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교수

<축제의 날, ’미국’이라는 이름의 나라에서>

1. 미국시간으로 2020년 11월 7일, 이 포스팅을 쓰는 토요일 오전, 온 나라가 대통령직의 전이라는 중대한 전환점에 있음을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다. 바이든-해리스의 승리가 확실성을 가지고 뉴스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바이든은 “이제 미국은 하나가 되어 치유하는 시간”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여러 정치인이 바이든-해리스에게 축하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그런데 이 시간 트럼프는 골프장에 있다. 트위터를 하지 못하도록 ‘골프장에 보내졌다’고 하는 말도 있지만, 트럼프가 스스로 결정하지 않으면 그를 움직일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편에서는 ‘일치와 치유’의 메시지를 전하는 지도자가 서 있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분열과 폭력을 부추기는 지도자가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충적 장면이다. 그러나 지난 4년 동안 트럼프를 경험한 이들은 이러한 트럼프의 모습에 별로 놀라지 않는다. CNN뉴스는 미국 곳곳에서 사람들이 길에 나와 바이든-해리스의 승리를 축하하는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모습을 계속 전해주고 있다.

2. 11월 3일 이후 오늘 11월 7일, 며칠 만에 편한 마음으로 모니터에 CNN을 켜놓고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이 토요일 아침에 비로소 바이든-해리스가 다수의 선거인단 표를 확보한 것이 뉴스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11월 3일부터 나는 TV 뉴스를 보기 힘들었다. 서너 시간마다 인터넷 신문들의 커버스토리를 살펴보았다. TV 뉴스는 직접적으로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런저런 억측, 트럼프 캠프에서 나오는 가짜뉴스, 허위사실, 폭력을 부추기는 언사들의 직접 음성을 듣는 것은 활자로 읽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오래전 슬라보예 지젝은 “미국 시민만 빼고 온 세계의 사람들이 미국 대통령을 선출할 수 있는 투표권이 주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물론 이 주장은 현실적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미국의 대통령이 한 나라만이 아니라, 이 세계에 미치는 강력한 영향을 비판적으로 지적하는 것이다. 도대체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선거에 왜 온 세계가 관심하는가.

3. 바이든-해리스를 좋아해서 그에게 표를 준 사람도 있고, 많은 이들이 분석하듯 트럼프가 아니기 때문에 표를 준 사람이 있다. 이유야 어떠하든 분명한 것은 지난 4년동안 트럼프가 미국만이 아니라, 이 세계 전체에 준 가시적-비가시적 해악은 객관적인 데이터 이상이다. 나는 한 사람이 사용하고 있는 그의 개념들, 그 개념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는 이야기들에 늘 관심한다. 21세기 인류의 보편가치인 거대 개념들, 예를 들어서 평화, 정의, 공존, 평등 과 같은 것은 더 이상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와 같이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존, 평화로운 삶, 안정된 삶을 위해서 너무나 절실한 가치다. 나는 트럼프의 연설이나 그가 광적으로 즐기는 트위터에서의 언어들에서 미국인만이 아니라 이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자리에 있는 지도자가 지녀야 할 최소한의 가치가 담겨있다는 것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반대로, 그는 지난 4년 동안 인종혐오, 이슬람 혐오, 여성혐오, 빈곤층 혐오, 성소수자혐오 등 열거하기조차 불가능한 갖가지 혐오가치와 언어를 정치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일상세계에 쏟아내었다. 소위 전문가들의 분석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그 파괴적 영향력을 아마 역사가 한참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그 일부분이라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4. 나는 영웅적 지도자가 등장해서 한 나라는 물론 이 세계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환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기에 바이든-해리스 팀이 미국을 이끌어가게 된다고 해서 별안간 우리가 원하는 변화를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완전한 의미의 정의실현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도대체 왜 정의의 확장을 위한 갈망을 지니고 사는가. 라인홀드 니버는 ‘덜한 악(lesser evil)’ 이라는 어찌 보면 지나치게 소극적인 답을 제시한다. 그러나 트럼프를 4년간 경험하면서, 이러한 소극적인 기대조차 얼마나 이루기 어려운 현실인가를 매일 경험했다. 사람의 냄새를 느끼기 어려운 지도자,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무지한 지도자, 혐오와 폭력, 그리고 권력에의 욕망만으로 가득한 지도자가 미국이라는 한 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에 강력한 파괴적 폭력을 행사해 왔다. 이제 어제보다는 조금 나은 내일을 조심스럽게 기대해본다. 어제보다는 조금 덜 혐오적이고 폭력적인 내일을 기대해본다. 어제보다는 덜 이기적이고, 조금 더 정의의 확장을 위하여 하나가 되는 연대의 가능성에 대한 조심스럽게 기대해 본다.

5. 오늘 수많은 사람이 공유한 트위터가 있다. 트럼프의 것이 아닌 카말라 해리스의 트위터다. 아침 운동을 하다가 조 바이든과 통화하는 모습이다. 단순한 메시지 “we did it, we did it, Joe, you are going to be the next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이다. 이 메시지를 한국어로 번역하면 두 가지가 가능하다: “우리가 해냈어. 조, 우리가 정말 해냈어, 너는 이제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 될꺼야.” 또 다른 번역은 “조, 우리가 해냈습니다. 우리가 정말 해 냈습니다. 당신은 이제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 되시는 겁니다.” 해리스의 문장이 담아내는 복합적인 가치는 이 두 종류의 번역에 담아지지 않는다. 언어란 그 사회의 가치구조를 구성하고, 강화하고, 확산하는 강력한 가치도구가 된다는 점에서, 오직 존대말이나 반말의 표현되는 관계설정 통하여 위계적 인간관계의 위계성이 디폴트로 자리잡고 있는 한국사회에서는 ‘미국’이라는 이름의 나라가 왜 그 지독한 어두운 측면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에서 정치세계만이 아니라, 교육, 과학, 경제, 문화와 예술, 그리고 종교영역에서까지 여전히 새로운 창의성과 전통을 창출하는 힘을 지니고 있는지를 이해하기 어렵다.

뉴스에서 계속 백악관 주변은 물론 미국 전역에서 벌어지는 축제의 광경을 보여주고 있다. 트럼프가 백악관 주변에서 벌이는 축제를 바라보며 이제 어떤 폭력적 행보를 보일까에 대하여 적어도 오늘만이라도 잠시 접어두고자 한다. 그리고 오늘은 그저 단순한 마음으로 나도 이 축제에 함께 하고 싶다. 가까운 곳, 먼 곳에 계신 여러 분들과 이 축제성을 나누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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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두 개의 링크를 나눈다.

1) 미국시간 2020년 11월 7일 토요일, 카멜라 해리스의 트위트: https://twitter.com/kamalah.../status/1325126733482385409...

2) 2016년 11월 16일, 경향신문에 “트럼프적 혐오사회에 저항하기”라는 글을 썼었다. 벌써 4년전인 오늘, 만감이 교차한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

 

지난 11월8일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됐다. 미국의 지성잡지라고 일컬어지는 ‘뉴요커’는 트럼프의 당선을 ‘미국의 비극’이라고 표현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분석을 실었다. 각기 다른 전문가들의 분석이 얼마만큼 정확하고 포괄적인지에 대한 논의는 제쳐놓고라도, 내가 보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트럼프가 지닌 ‘가치관’이다.

그의 삶이나 선거기간 동안 그가 보여준 연설과 행동에서 드러난 그의 가치관은 여성혐오, 인종혐오, 성소수자혐오, 이슬람혐오, 외국인혐오 등 갖가지 ‘혐오주의’를 고스란히 내포하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이 결점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트럼프가 지닌 이러한 지독한 문제점 때문에 적어도 트럼프의 당선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나는 가지고 있었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그가 지속적으로 표출해 온 남성 중심주의, 백인 중심주의, 이성애 중심주의, 기독교 중심주의, 자국민 중심주의가 인종, 피부색, 젠더, 국적, 종교, 성정체성 등에서 유래하는 ‘다름’에 대한 적대감을 제도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제도화된 적대감’은 다양한 방식으로 타자에 대한 혐오를 자연적이고 정당한 것으로 ‘합법화’시키기 때문이다.

미국은 21세기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어서 ‘신제국’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미국은 단순히 모든 나라 중의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 대통령은 한 나라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적 삶을 좌우할 만큼 영향력이 막강하다. 물론 트럼프는 전통적 의미의 파시즘을 행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가치관을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현대판 파시즘을 국내외의 다양한 소수자들에게 행사할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여성, 이주민, 이슬람교도, 성소수자, 유색인종 등 많은 이들을 제도적으로 ‘주변화’하고 그들의 삶의 방식을 ‘범죄화’함으로서, 미국은 환대사회가 아닌 적대사회로, 포용사회가 아닌 배제사회로의 이행을 정치적으로 제도화할 위험이 있다. 미국이 이렇게 타자에 대한 혐오사회로 이행하면 이 세계 곳곳에 다층적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과연 누가 이러한 혐오적 가치를 노골화하고 있는 트럼프를 지지했는가를 조명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도 참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트럼프의 당선을 가능하게 한 막강한 세력은 ‘대학교육을 받지 않은 하층 백인’, 특히 남성들이었다. 트럼프가 여자였다면 또는 그가 엄청난 부를 소유한 백인이 아니었다면, 그의 당선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학교육을 받지 않은 백인 남성’들이 적대와 혐오를 노골화한 남성 트럼프를 지지하고, 그의 경제적 부와 성공을 자신들의 판타지로 삼았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중요하다. 인종, 계층, 성별이 작동한 이 지점에서 내가 말하려는 것은 단순한 학력주의가 아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비판적 사유하기’를 주요 목적으로 삼는 교육을 통해서, 평등과 정의, 그리고 포용과 관용을 배우는 것의 중요성이다. 인류의 역사는 인류의 보편가치인 정의, 평등, 포용의 관점에서 볼 때 언제나 진보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경제적인 ‘보이는 발전’이 언제나 인간됨을 의미하는 가치들의 확산인 ‘보이지 않는 발전’과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경제적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특정한 그룹에 대한 인권 유린과 탄압이 자연적인 것으로 제도화될 때 이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은 ‘비판적 사유’와 그 사유에 근거한 연대적 실천이다. 그래서 ‘사유-판단-행동’은 우리가 이 세계와 연계되는 매우 중요한 세 가지 연결고리가 되는 것이다.

 

 

‘이 세계는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다.’ 장-뤽 낭시의 말이다. 그런데 이 세계를 파괴하는 것은 생태위기, 기아, 전쟁 등 ‘보이는 파괴’만이 아니다. 모든 인간의 권리 확장, 평등과 정의와 같이 ‘보이지 않는 가치들’의 붕괴도 심각하게 이 세계의 파괴에 기여하고 있다. 우리는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을 배우고, 그 사유에 근거하여 판단하고 행동하는 시민으로 스스로 성숙하는 것을 모색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적대와 혐오사회로의 이행에 다층적으로 저항하고 실천하기 위한 힘을 기르게 될 것이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11162120005&code=990304&fbclid=IwAR2qlXZyuL9hEdVmvPQgqdjx65yO9zWRFHkdPL-byVcgs4v_cDxRRAF7lYQ#csidxac63a0e403c6b0384de1c1d49ac86c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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