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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

현각 스님이 혜민 스님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승려가 승려를 비판한 점도 놀랍거니와 비판의 강도도 가혹하다. 현각의 비판은 한마디로 혜민이 땡추라는 것이다.

현각스님의 직설을 한 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혜민은 '사업자이자 배우'이며 '진정한 참선의 경험이 전혀 없다'고 직폭했다. 게다가 혜민의 책을 접하는 유럽 사람들은 그가 선불교에 대해 매우 피상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불평하고 있는 실정이란다. 그래서 현각이 혜민의 실수를 바로 잡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고 한다.

현각의 비판은 적절할까? 적절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적절하다는 것은 현각이 추구하는 원형적인 불도의 관점에서는 혜민은 선사나 암자 수행승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혜민의 스타일은 현각이 미국 땅에서 그토록 역겨워하고 결별했던 비즈니스 감각이 뛰어난 마케팅 종교의 모습과 진배 다름 없어 보일 것이다. 그리고 현각의 메시지는 불교의 메시지를 대중의 입맛에 맞게 꾸며 전달delivery하는 ‘편집 과정’을 거친다. ‘진정한 참선의 경험이 전혀 없다’는 말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메시지가 너무 가볍고 통속화되었다는 것일 게다. 사실 혜민의 논리는 불교적이라기보다 종종 불교 사상의 옷을 입은 ‘긍정심리학’이나 가벼운 심리치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건 현대 서구 철학의 메시지보다 훨씬 수준 낮은 얇박한 위로의 아스피린을 투여하는 메시지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현각의 비판은 지나친 면도 있다. 혜민은 수행자가 아니라 일종의 포교사이다. 그리고 작가이자 강연자이다. 여러 출판사에서 기획출판을 하는 대상이 되고, 공중파 교양프로그램에 전문 담당 PD가 있는 수준의 사람이다. 즉 그는 대중적인 불자 포교사이다. 사업가나 배우는 아니지만, 방송 마케터에 의해 편집되고 기획되고 유통된다. 일종의 문화 상품이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불교의 이미지에 적잖은 도움을 주는 대중강연자이기도 할 게다. 불교에서 다양한 종파와 노선이 있고 노선에 따라 가르침의 강조점도 저마다 다르다. 혜민은 동굴 수행자도 참선 선생도 아니다. 단지 일종의 교사이자 엔터테인먼트 공간에 최적화된 포교승으로 보면 된다. 그런 류의 이미지 괜찮은 교사나 대중적인 메신저가 있다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무속인 수준의 승려나 요승들에 비하면 열 배나 낫다. 혜민 같은 이가 열 명이 된들 그게 무슨 불편한 일인가?

현각의 비판에서 우리는 서구적 비평 스타일을 목격하게 된다. 동양적 거리두기나 관용의 태도를 발견하기 힘들다. 그런 면에서 현각은 프로테스탄트적이다. 너그러움이나 방관의 태도가 아니라 직접 개입하여 독설을 내뱉는다. 멋지다. 듣기로는 현각은 불교의 정수를 공부하러 한국에 왔다. 그리고 절망했다. 기복종교화된 불교와 종교권력화된 교권에 진저머리 난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한국 불교와 결별했다. 이제는 혜민을 거진 타락한 종교장사꾼으로 평가한다. 그런 면에서 그는 다분히 근본주의적이다. 근본주의적인 진리 추구, 이것은 서구적 마인드이다. 그런 면에서 현각에게서 서구적 구도자의 에토스와 로고스를 발견하게 된다.

현각은 불교 수행자이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예언자적이다. 현각의 관점에서 다른 종교들을 비판한다면 그 어느 종교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가 예언자적 파토스를 지닌 종교인으로 보이는 건 나만의 느낌일까. 여튼 나는 현각의 비판에 후히 공감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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