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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요훈

‘전교 1등’의 정신세계

아침뉴스에 ‘건강 코너’가 있었다. 의사 인터뷰로 건강 정보를 제공하는 코너였는데, 일상의 ‘잔병’에 대한 내용이 많았다. 그 방송이 나간 뒤에는 오전 내내 사회부 쪽으로 전화가 계속 오는데, 대부분 노인들이었고 어느 병원 의사인지 알려달라는 거였다.

큰 병이 아니니 동네 의원에 가도 된다고 설명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광고가 될까봐 소속 병원을 밝히지 않은 건데, 사정을 하며 매달리니 알려주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대 병원은 무조건 최고이고 TV에 나왔으니 보증수표라는 합리가 통하지 않는 맹목적 신봉, 우상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정보가 아니라 광고가 되고 합리적 판단을 가로막는 부작용만 키운 건강 코너는 결국 폐지되었다. 나도 폐지론자의 한 명이었다.

의사협회가 만들었다는 선전용 설문을 보면서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전교 1등’과 ‘수능 성적’이었다. 의사들에게 ‘전교 1등’은 우상이고, 우월감의 상징이고, 수능 성적은 특권을 보장하는 증표가 되는가 보다.

의사들은 모두 ‘전교 1등’이었거나, ‘전교 1등을 다투는 최상위의 성적’을 갖고 있었을까. 궁금하여 찾아보았다. 전국에 37개의 의대가 있고, 입학정원을 모두 합치면 3,058명이다. 전국의 고등학교는 2,225곳이고, 그중에 인문계 고교는 1,534곳이다.

지난해의 입시자료를 찾아보니, 전국 37개 의대가 서울대를 정점으로 1등에서 꼴찌까지 서열이 매겨져 있다. 그 서열은 어느 의대가 실력도 있고 평판도 좋은 의사들을 많이 배출했는가로 따진 서열이 아니라 입학 당시의 수능 성적으로 매긴 서열이다.

TV에 나왔으니 영험한 의사일 거라는 노인의 맹목적 신봉과 의사협회의 선전용 설문에 나와있는 ‘전교 1등’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본다. 전교 1등을 한 의사, 공부를 잘한 의사가 꼭 좋은 의사가 되는 건 아니다. 의대를 가고자 했다면 37개 의대 중에 어디든 골라 갈 수 있었던 이들은 무지 많다. 서울대 의대든 어디든 갈 수 있었음에도 기초과학 분야나 공대로 진학하는 '애국적' 결정을 한 이들도 많다.

의사협회의 선전용 설문에 있는 ‘전교 1등’에서 그들의 정신세계를 엿본다. 우리는 이렇게 공부를 잘한 사람들이야, 그러니 너희들과는 다르다는 우월감의 특권의식과 전교 1등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과 같은 울타리 안에 있다는 과시욕을 드러내 보인 게 설문의 ‘전교 1등’이 아닐까.

‘전교 1등’의 정신세계는 자기중심적이다. 특별한 대우를 받는 건 당연하다. 내가 옳다면 옳은 것이고 아니라면 아닌 거다. 내가 하지 말라는데 공공의대든 공공의사는 추진하면 안 된다.

‘전교 1등’의 정신세계는 이기적이다. 내게 이로워야 남들에게도 이롭다. 나한테 불리한 건 남들한테도 불리한 거다. 공공의대 신설은 나에게 좋지 않으므로 남들에게도 좋지 않은 거다.

그들에게 공정성의 기준은 ‘나’다. 나는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고, 그 결과물이 지금의 이 자리다. 나와 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고 이 자리에 오르는 건 불공정한 거다. 공공의대 나온 의사는 나와 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을 것이므로 그들이 의사가 되는 건 불공정하다. 인천공항공사 정규직 젊은이들의 불공정 주장과 궤를 같이 한다.

자기중심적이니 배타적이고, 우월하다 착각하니 차별적이고, 이기적이니 적대적이고 협량하다. 그런 사람에게서 합리성을 기대하기 힘들다. 공감능력을 기대하기 힘들다. 의사라는 직업은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다. 여느 직업에 비해 공공성이 강한 직업이라는 것이고, 의사가 존경받는 건 단지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어서도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진료 거부의 집단행동을 하고 있는 의사들은 내가 의사되는데 니들이 10원이라도 보태준 적이 있느냐며 의사는 공공재가 아니라고 선언하듯 말한다. 그 말인즉, 국가가 내 직업에 개입하지 말라는 뜻으로 들린다. 철저하게 나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겠다는 뜻으로 들린다. 진료를 거부하면서 하루빨리 환자들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건 위선이고 허위다.

그렇다면 별 수 없다. 수요와 공급에 따라 시장이 움직이는 자본주의 원리에 따를 수밖에. 의사 수요는 많고 공급은 부족하니, 의대를 증설하든 의대 정원을 늘리든 공공의대를 신설하든 의사 공급을 늘려라. 의사가 되고자 하는 젊은이들은 많다.

의사들에게도 다른 서비스업종과 똑같이 대우하라. 불량제품을 생산 판매하면 제조물책임법에 따라 처벌을 받듯 오진을 하거나 의료사고가 나면 일단 책임부터 물어라.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나. 마스크가 부족하면 공장을 늘리고 고추 파동이 나면 고추를 수입해오지 않는가. 의사들도 그렇게 하라. 그래야 공정하지 않겠나.

전교 1등이었다고, 수능 성적이 좋았다고, 자격시험을 통과했다고, 그 이유만으로 평생을 보장받는 건 공정하지 못하다. 그것으로 기득권의 진입장벽을 쌓고 그 안에서 특권을 누리는 건 공정하지 못하다.

기자사회도 마찬가지다. 공부 좀 했고, 좋은 학교 나왔고, 운 좋게 입사시험을 통과한 것으로 높다란 진입장벽을 쌓고, 언론의 자유를 울타리 삼아 나태한 기득권과 방종의 특권을 향유하다 인터넷 혁명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기레기 신세로 전락한 것 아닌가.

어찌 보면 의사협회의 선전용 설문에 나와 있는 ‘전교 1등’과 ‘수능 성적’은 의사만이 아니라 판검사, 기자, 교수 등 이 사회의 상류 엘리트집단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병증(病症)이고 병인(病因)아닐까 한다.

듣자하니, 전공의들의 진료 거부를 이끄는 대표는 계명대 의대를 나왔고 삼성서울병원에 재직 중이라 한다. 전공의 대표이니 당연히 서울대 출신이겠거니 했었다. 나의 고정관념이고 편견이다.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전교 1등’의 강박증적 고정관념은 내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진료 거부에는 동의하지 않으나 나는 전공의 대표라는 그 젊은 의사를 칭찬하고 싶다. 서울대 의대보다 한참이나 서열이 낮은 대학을 나왔으나 본인이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한국 최고라는 삼성병원에 취직을 하였으니 칭찬함이 마땅하다고 본다. 삼성병원에도 서울대병원에도 전교 1등도 아니고 서열 1위 서울의대를 나오지도 않았지만 실력 있는 의사들이 많으면 좋겠다.

진입장벽을 허물어야 한다. 기회가 열려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고교 시절에 전교 1등을 했다고, 수능 성적을 잘 받았다고, 서열이 높은 대학을 나왔다고, 자격시험이든 입사시험이든 운 좋게 통과했다고, 그것이 평생을 보장하는 기득권이 되고 특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건 공정한 사회가 아니다. 경쟁의 룰이 공평하고, 기회가 열려 있는 사회가 공정한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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