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

2020. 10. 2. 22:06

 

너 자신을 알라. 

자신의 적은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을 보는 사람이야말로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다.

나는 아직 자신의 잘못을 보고서 안으로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자신의 척도로 자신을 평가하고 자신의 발에 맞는 신발을 신어야 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조롱하는 자는 조롱하지 않는다.

내려와 보시요.당신의 집이 얼마나 초라한지 알게 될 것이요.

나 자신은 나의 친구인 동시에 적이다.

자기라는 학문에는 스승이 없다.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도,괴소평가하는 것도 모두 큰 괴오이다.

달팽이는 남이 일러주기 전까지는 자신의껍데기 모습을 모른다.

여우는 자신의 냄새는 맡지 못한다.

자기의 가장 나쁜 점을 알 정도로 나쁜 자는 없다.

머리에 혹이 있는 자는 가끔씩 혹을 만져보아야 한다.

네 스스로 적을 찾지 못한다면 너의 어머니가 이 세상에 너의 적 한 명을 낳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라.

타인을 아는 것은 하나의 학문일 뿐이다.그러나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지성이다.

자신의 얼굴은 거울로 볼 수 있지만,자신의 영혼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암돼지는 자신의 진창에 있다는 것을 모른다.

자기 자신을 아는 자만이 자기 자신의 스승이 될 수 있다.

네 일을 하고,너 자신을 알아라.

너 자신을 아는 법을 배워라.그리고 스르로 내려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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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개신교를 파헤치다②]‘반공주의’ 들고 독재정권과 함께 성장한 극우개신교

신문 2020. 10. 2. 16:54

보수 기독교단체 회원들이 지난해 3월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 연 '구국과 자유통일을 위한 3·1절 한국교회 회개의 금식기도 대성회 및 범국민대회’ⓒ임화영 기자

 

통계청이 발표한 ‘2015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신자 숫자가 가장 많은 종교는 개신교로 나타났다. 통계청은 1985년부터 10년마다 종교인구 조사를 하고 있다. 그런데 통계청 조사에서 개신교가 신자수 1위를 기록한 것은 2015년 조사가 처음이다. 그동안 부동의 1위였던 불교는 2위로 밀려났다. 당시 조사에서 개신교 신자라고 밝힌 사람은 19.7%(967만명)였고, 불교 신자라고 밝힌 사람은 15.5%(761만 명), 천주교는 7.9%(389만 명)였다. 2005년과 비교하면 개신교 신자는 125만 명이 늘어난 반면 불교는 296만 9천 명, 천주교는 112만 5천 명이 줄어들었다. 이 기간 개신교만 유일하게 신자가 늘어난 것이다.

인구의 1%였던 개신교
가장 많은 신자를 가진 종교가 되다
박정희 집권시기
884.3% 늘어난 개신교 신자

학자들의 연구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해방 직후인 지난 1945년 개신교 인구는 30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산한다. 해방 당시 인구가 2500만 명 정도였으니 인구의 1~2%에 불과했다. 더구나 남한보다 북한에 개신교 인구가 더 많았던 상황이다. 강인철 한신대 교수는 2007년 발표한 ‘남한의 월남 종교인들:반공주의와 민주주의에 미친 영향’이라는 논문에서 “1945년 해방 당시 한반도 전체 개신교 신자의 60%가량인 약 20만 명이 북한 지역에 살았는데, 이들의 35∼50%에 해당하는 7만∼10만 명이 1945∼1953년 사이 남한으로 이동했고, 장로교와 감리교의 주축을 이뤘다”고 설명했다. 북에서 넘어온 개신교 신자들까지 더한다 해도 1945년 당시 남한의 개신교 신자는 20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

인구의 1~2%에 불과하던 개신교는 이후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한다.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엔 50만 명으로 두 배 늘어났다. 그러다 폭발적인 증가를 기록하게 된 시점은 1960년대와 1970년대로 박정희 집권 시기와 일치한다. 기독교대연감과 한국종교연감 등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박정희 집권 첫해인 1961년 60만7천여 명이던 신자는 박정희가 사망한 1979년 598만여 명으로 884.3%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개신교 신자의 급격한 증가세는 통계청 조사가 시작된 이후 통계로도 확인된다. 통계조사가 시작된 지난 1985년엔 649만 명이었고, 1995년엔 876만 명으로 나타났다. 2005년엔 862만 명이었고, 2015년 조사에선 968만 명을 기록했다.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 시절이던 1985년에서 1995년 사이엔 200만 명 넘게 늘어났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이던 1995년에서 2005년 사이엔 소폭 감소하며 큰 변화가 없었지만, 다시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이던 2005년과 2015년 사이엔 개신교만 유일하게 신자 숫자가 125만 명 증가하면서 1위를 차지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개신교 신자의 증감을 살펴보면 정치 지형의 변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군사독재 등 권위주의 정부 시절과 장로 출신의 보수 성향의 대통령이 집권한 시절엔 큰 성장을 기록했지만, 그렇지 않았던 시기엔 소폭 감소 혹은 정체됐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변화엔 어떤 비밀이 숨어있는 것일까? 폭발적인 성장의 뒷면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독재정권과 김영삼, 이명박 등 장로 대통령과 유신의 퍼스트레이디였던 박근혜를 아낌없이 지원한 과거가 있다.

북에서 내려온 반공주의자들이 주축을 이뤘던 한국개신교는 서북청년단 등 우익테러단체를 결성해 제주4.3항쟁과 여순항쟁, 대구10월항쟁 진압에 가담하는 등 이승만 세력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힘을 보탰다. 이들은 ‘공산주의’를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붉은 용’에 비유하는 등 북을 ‘악마화’하면서 반공주의를 마치 ‘성전(聖戰)’처럼 수행했다.

미군정과 이승만의 도움으로
권력의 중심을 차지한 개신교…
종교적산 불하와 군종제도 등 특혜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장 김진호 목사는 “미 군정의 장택상과 조병옥 등 경찰 책임자들이 서북지역 출신 개신교인들을 활용했다. 군정의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통역관 정치를 했다. 그런 과정에서 당국으로부터 특혜를 입었다. 미군정은 이들을 일종의 행동대원으로 활용으로 활용했다. 이들은 남한으로 내려오면서 공격적 반공주의자로 변화한다. 북에서 가진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이 공격적 행동주의로 나타났다. 한국전쟁기를 지나면서 이러한 공격적 행동은 불타오르고, 당국 비호를 받으며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런 과정에서 개신교가 국교처럼 자원을 과점한 세력이 되자 개신교로 개종하는 이들까지 생겨나는 등 강력한 사회적 세력으로 발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권력과 가까워진 개신교는 이승만 정부 시절부터 각종 혜택을 받았다. 일본이 남긴 종교 적산을 우선 양도받고, 군종제도 등의 특혜를 얻어 성장할 수 있었다. 해방 직후 일제가 남긴 재산, 즉 적산(敵産)은 미군정 등을 거쳐 일반에 불하됐다. 이 과정에서 많은 특혜가 발생했고, 이 적산을 불하받은 많은 기업이 오늘날 재벌 대기업으로 성장한 것을 보면 적산불하를 통한 이익이 엄청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적산 가운데는 기업 적산뿐 아니라 종교 적산도 많았다. 그 종교 적산 가운데 상당 부분을 개신교가 차지하는 특혜를 입은 것이다.

일제강점기 개신교의 교세는 미미했다. 때문에, 일제가 남긴 개신교 관련 재산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개신교는 개신교 관련 재산뿐 아니라 일본의 신흥종교로 한반도에도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던 천리교(天理敎)의 재산을 불하받는 등 특혜를 받았다. 한경직 목사의 서울 영락교회(전 베다니교회), 김재준 목사의 서울 경동교회(전 야고보교회), 송창근 목사의 서울 성남교회(전 성바울교회) 등이 천리교 건물을 불하받아 교회를 만드는 등 신학적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상당수 교회와 신학교가 이런 과정을 통해 세워졌다. 적산불하는 이후 남한에 대형교회가 출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대통령 취임식을 하는 이승만. 개신교인이던 이승만 집권시기 개신교는 수많은 특혜를 받았다.ⓒ뉴시스

개신교에 유리했던 군종제도도 개신교 성장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우리나라 군대에 군종제도가 도입된 것은 한국전쟁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개신교는 해방 당시 1~2%에 불과했고, 천주교는 개신교보다도 적었지만, 개신교와 천주교는 이승만의 특혜로 1951년부터 1967년까지 군종을 독점했다. 불교 등에도 군종이 개방된 1967년 이후에도 개신교는 군종장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개신교의 군종장교비율은 1997년 66.7%에 이르렀고, 2004년엔 58.3%, 2018년 4월 국방부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여전히 개신교 군종장교는 258명으로 전체 군종장교 492명 가운데 52.4%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특혜를 바탕으로 해마다 10만 명에서 20만 명의 군인들에게 세례를 하는 등 공격적인 선교를 통해 개신교의 폭발적 성장을 위한 도구로 활용됐다.

한경직 목사
“저희 교회도 그날(6월25일)
반공예배를 드렸습니다”
박정희
“신앙을 가진다는 것이
바로 반공하는 것”

권력과 가까워진 개신교는 권력과 함께 성장했고, 그렇게 성장한 힘은 다시 독재정권을 지원하는 중요한 동력으로 활용됐다. 개신교 신자가 884.3% 늘어난 박정희 집권 시기와 개신교 대형교회들이 늘어난 1980년대 성장의 배후엔 이런 권력과의 결탁이 있었다. 이런 과정을 지나며 개신교가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극우화와 보수화도 가속화됐다.

박정희 정권 시기와 이후 독재정권에 이르기까지 개신교는 수많은 반공집회를 열었다. 아시아기독교반공대회, 세계기독교반공대회 등 국제행사를 개최했고, 기독교반공협회와 기독교반공교육협회 등 다양한 반공단체를 조직하는 등 반공여론 확산을 통해 박정희 정권에 힘을 실었다. 지난 1974년 7월 12일 청와대에서 박정희는 개신교 등 종교단체가 앞장서 만든 반공연맹 임원과 시도지부장 등과 만난 자리에서 6월 25일에 전국에서 반공대회를 연 것을 치하했다. 그러자 당시 반공연맹 임원을 맡은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는 “저희 교회에서도 그날 반공예배를 보았습니다”라고 말했고, 박정희는 웃음을 보이면서 “종교 그 자체가 반공 그 자체가 아니겠느냐”며 “신앙을 가진다는 것이 바로 반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당시 언론이 보도하고 있다. 개신교의 반공주의가 박정희에게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평화위원장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는 “반공주의를 매개로 권력과 결탁한 개신교 세력들은 특혜를 누렸다. 박정희 정권이 친 개신교 정부라고 말하긴 어려워도 상당한 도움을 준 건 사실이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반공주의를 내걸었다. 하지만 박정희의 좌익전력 때문에 미국은 의혹의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민간사절단이란 이름의 특사로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 김활란 등 개신교계 인사들이 미국을 방문해 쿠데타 당위성을 밝히며 설득했다. 박정희 집권 시기에 빌리 그라함 목사의 민족 대복음화 집회가 여의도에서 열린다. 당시 김장환 목사가 통역했다. 김준곤 목사는 10월 유신 환영 메시지도 냈다. 보수 개신교세력들은 정교분리를 외치며 진보 개신교 세력의 활동을 비판하면서도 자신들은 정권과 사실상의 뒷거래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1968년 대통령 조찬 기도회라는 열린 첫 공식 국가조찬기도회. 이날 기도회에서 김준곤 목사는 “우리나라의 군사혁명이 성공한 이유는 하나님이 혁명을 성공시킨 것”이라고 박정희 대통령을 칭송했다.ⓒ국가기록원 홈페이지

1973년 김준곤 목사 설교
“민족의 운명을 걸고
세계의 주시 속에 벌어지고 있는
10월 유신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기어이 성공시켜야 하겠다”

독재자들을 축복했던 조찬기도회도 개신교의 극우화와 권력지향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국가조찬기도회는 박정희 정권 시절이던 한국대학생선교회(CCC)를 만든 고 김준곤 목사가 제안해 1965년 시작한 국회조찬기도회에 기원을 두고 있다. 1968년 열린 첫 공식 국가조찬기도회에서 김준곤 목사는 박정희를 향해 최고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김 목사는 “박정희 대통령이 이룩하려는 나라가 속히 임하길 빈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또 “우리나라의 군사혁명이 성공한 이유는 하나님이 혁명을 성공시킨 것”이라고까지 칭송했다.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발표한 다음 해인 1973년 열린 국가조찬기도회에서도 찬양 발언을 이어갔다. 김 목사는 “민족의 운명을 걸고 세계의 주시 속에 벌어지고 있는 10월 유신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기어이 성공시켜야 하겠다”며 “당초 정신혁명의 성격도 포함하고 있는 이 운동은 … 맑스주의와 허무주의를 초극하는 새로운 정신적 차원으로까지 승화시켜야 될 줄 안다. 외람되지만 각하의 치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군신자화운동이 종교계에서는 이미 세계적 자랑이 되고 있는데 그것이 만일 전민족신자화운동으로까지 확대될 수만 있다면 10월 유신은 실로 세계 정신사적 새 물결을 만들고 신명기 28장에 약속된 성서적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살자’ 전두환을 축복한 목사들
“어려운 시기에 막중한 직책을 맡아
사회악을 제거하고 정화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

1980년에는 광주시민을 학살한 뒤 권좌에 오른 전두환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축북을 기원하는 치욕적인 장면까지 보여줬다. 정식 국가조찬기도회는 아니지만 당시 개신교 목사들은 1980년 8월 6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열고 전두환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당시 조찬기도회는 공중파 방송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됐고, 광주 학살을 기반으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의 안정적인 통치기반의 마련을 개신교 목회자들이 도운 것이다. 당시 조찬기도회에선 ‘학살자’ 전두환을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여호수아에 비교하며 “어려운 시기에 막중한 직책을 맡아 사회악을 제거하고 정화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하기도 했다.

1980년 8월 전두환을 위해 개신교계가 연 조찬기도회 모습ⓒ기타

독재정권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평신도들을 동원해 대규모 기도회를 열며 정권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 민주화의 열풍이 불던 1987년. 전두환 정권에 맞서 많은 시민이 민주화를 외치며 투쟁하던 이 시기 정권이 위기를 맞자 그해 10월 3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선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 대성회’가 열렸다. 개신교 보수세력들은 민주화 열풍의 시기를 ‘북한의 테러위협과 학생시위, 노동쟁의로 분열과 대립’의 시기로 규정하며 신도들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다. 한국개신교단협의회 등이 주축이 돼서 열린 기도회에선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 극동방송 사장인 김장환 목사 등이 단상에 올랐다. 100만 명이 넘는 개신교 신자들이 함께한 기도회에선 공산집단의 붉은 마수의 흉계를 경계하고, 정치인 근로자 학생 모두의 자성을 촉구하는 등 4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독재정권의 위기 때마다 열린 기도회
1975년 한경직 목사 설교
“나라 없이는 신앙도 자유도 재산도
모두 잃게 되므로
자유 민주국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온 국민이 깨어나 함께 기도하자”

박정희 대통령 집권 시절이던 지난 1975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유신 독재에 맞선 시민들의 저항이 커졌고, 박정희 대통령은 이런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유신헌법 재신임 투표를 추진했다. 그해 4월9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고인들을 사형선고 20시간 만에 사형에 처하는 등 인권탄압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의 위기가 커지자 6월 22일 개신교 보수세력이 중심이 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40만 명이 모여 ‘나라를 위한 기독교 연합 기도회’를 열었다. 기도회는 4월부터 준비됐다. 각 교단들이 모임을 갖고 기독교범교단지도자협의회를 결성하기로 하고, 한경직 목사를 회장으로 추대했다. 협의회는 “최근 인도차이나 사태에 따른 공산주의의 위협을 중시해 이에 대해 최대의 관심을 기울인다”는 성명을 발표하며 기도회를 추진했다. 22일 열린 기도회에서 한경직 목사는 대회사를 통해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지금 남침야욕에 혈안이 돼 있다”고 지적하면서 “나라 없이는 신앙도 자유도 재산도 모두 잃게 되므로 자유 민주국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온 국민이 깨어나 함께 기도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1975년 박정희 정권이 위기에 처하자 그해 6월22일 개신교 보수세력이 중심이 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40만 명이 모여 ‘나라를 위한 기독교 연합 기도회’를 열었다. 당시 기도회를 보도한 6월23일자 동아일보 기사ⓒ기타

2년 뒤인 1977년 8월에도 서울 여의도광장에선 ‘77민족복음화대성회’가 열렸다. 150만 명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 집회에선 “우리는 계속 복음화의 기수가 될 것을 다짐한다. 김일성 북한 괴뢰정권은 침략야욕을 버리고 정부의 통일 노력에 호응하라.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를 중지하고 우방으로서 신의를 지키라”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당시는 미군 철수 문제 등을 두고 논란이 이는 등 박정희 정권이 위기를 겪고 있었고, 위기의 박정희 정권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이런 행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17년 박근혜 탄핵을 앞두고 한국교회총연합회는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2017한국교회대각성 기도회’를 열어 난국에 빠진 우리나라와 교회를 구하기 위해 회개운동을 벌이자고 호소했다. 이에 앞서 열린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교회연합이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서 ‘3.1 만세운동 구국기도회’는 사실상 ‘대통령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 총궐기 운동본부’ 집회 사전 집회 성격의 행사였다. ‘구국 기도’와 ‘교회대각성’을 내걸었지만 사실상 위기에 처한 박근혜를 특면 지원하기 위한 행사였다. 그리고, 박근혜가 탄핵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보수세력이 권력을 잃어버리자 문재인 정부를 공산주의 또는 악의 세력이라 주장하며 ‘구국기도회’를 빙자한 극우집회를 열고 있다.

박정희식 근대화의 논리를
철저하게 내면화하고,
체질화했던 게 개신교였다

개신교 성장의 비밀엔 이런 정치적 요소뿐 아니라 또 다른 영향도 있다. 바로 ‘번영신학(繁榮神學)’이다. ‘번영신학’은 금전적 축복이나 물질적 풍성함이 신의 뜻이라고 믿으며 신앙이 자신들의 물질적 부를 증가시킨다고 믿는 신앙이다. 신을 믿으면 물질적 축복을 줄 것이라는 이라는 믿음은 반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국의 개신교에선 자주 만나는 모습이다. 이런 개신교의 ‘번영신학’이 박정희 시대의 개발독재와 맞아 떨어졌다.

교회협 정의평화위원장 최형묵 목사는 “거시적으로 조명하면 정권의 비호뿐 아니라 급속한 근대화로 인한 아노미 상태,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하면서 해체된 공동체를 대신할 곳으로 교회가 주목받은 시대 상황도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박정희식 근대화의 논리를 철저하게 내면화하고, 체질화했던 게 개신교였다는 것이다. 성장주의를 추구하면서 가시적인 물질적 성취에만 관심을 두었다. 물질적 성장이 곧 신의 축복으로 여기게 했다. 이런 부분은 민주주의보다는 경제가 우선이라던 박정희 정권의 이익과 통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극우세력의 활동이 심상치 않다. 극우적 성향의 유튜브 방송이 활개를 치고 있다. 이미 역사적 평가가 끝난 광주항쟁을 북한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계속된다. 심지어 이런 주장이 국회에까지 등장하면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한국 사회의 극우화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세력은 바로 한국개신교다. 개신교는 지금 태극기집회 등 극우세력 활동의 주축을 이루고 있고, 각종 극우적 성향의 정치 논리들을 하나님의 뜻이라 믿으며 행동하고 유포한다. 개신교가 극우주의의 행동대원으로 나서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개신교 극우화의 역사와 배경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 사회 극우화의 맥락을 읽는 데도 중요한 요소다. 극우개신교의 역사와 배경을 짚는 기사를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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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종술 기자

문화와 종교 분야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극우개신교를 파헤치다①] 극우개신교 뿌리는 제주 4.3 학살 주도한 서북청년단

신문 2020. 10. 2. 16:53

소련군 철수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서북청년단 단원들.ⓒ기타

극우세력의 활동이 심상치 않다. 극우적 성향의 유튜브 방송이 활개를 치고 있다. 이미 역사적 평가가 끝난 광주항쟁을 북한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계속된다. 심지어 이런 주장이 국회에까지 등장하면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한국 사회의 극우화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세력은 바로 한국개신교다. 개신교는 지금 태극기집회 등 극우세력 활동의 주축을 이루고 있고, 각종 극우적 성향의 정치 논리들을 하나님의 뜻이라 믿으며 행동하고 유포한다. 개신교가 극우주의의 행동대원으로 나서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개신교 극우화의 역사와 배경을 살펴보는 것은 우리 사회 극우화의 맥락을 읽는 데도 중요한 요소다. 극우개신교의 역사와 배경을 짚는 기사를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이 질곡의 역사 속에 교회는 분단과 냉전을 신학적으로 정당화면서 빛을 잃고, 일부는 신앙의 이름으로 자매․형제․부모 그리고 이웃을 총칼 앞에 서게 했습니다. 싸늘한 주검 위에 흙 한줌 뿌릴 시간마저 빼앗긴 수난의 역사 앞에서 교회는 침묵하였습니다. 편을 가르고 등을 돌리며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혀 스스로 심판자의 자리에 서서 죄악에 동참하였습니다. 우리 안의 무서운 폭력성을 회개합니다. 우리의 잘못을 사죄합니다. 십자가 아래 화해의 여정에 무릎을 꿇고 참여합니다.”

제주 4.3항쟁 70주년을 맞이한 지난해 4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 정의평화위원회와 인권센터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제주 4·3 역사 정의와 화해를 위한 기도회’를 열고 제주 4.3 유족들과 국민에게 학살에 동참했던 과거를 사죄했다.

이에 앞서 3월28일엔 제주를 직접 방문해 제주 4.3 희생자들이 묻혀있는 의귀리의 현의합장묘와 송령이골 무장대 무덤에 식수를 하며 “아직 우리는 유족들이 내밀어 주시는 용서의 손길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유족들이 전해 준 고결한 화해의 메시지를 값싸게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 한국 기독교는 4.3의 치유와 화해를 위해 충분한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가해사실을 고백하지도 못했습니다. 한국교회 안에는 4.3사건의 본질이 무엇인지조차 잘 모르는 이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유족들의 손을 덥석 잡기에는 우리 손은 여전히 희생자들의 피로 적셔져 있습니다”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제주4.3항쟁 제70주기였던 지난해 4월3일 오후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제주4.3희생자들의 분장을 한 시민들이 4.3항쟁을 추모하는 403광화문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제주4.3 학살에 함께한 서북청년단은 이북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개신교인들이 주축이 돼 만들어진 단체였다.ⓒ임화영 기자

제주 4.3항쟁 70주년을 맞아 개신교계 연합기관인 교회협이 사죄한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 제주 4.3항쟁 당시 민간인 학살 등을 자행한 ‘서북청년단’(서북청년회)의 중심세력이 바로 개신교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서북청년단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개신교 세력은 이후 한국개신교의 주류가 됐고, 지금 거리에서 극우세력과 함께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드는 극우개신교의 사상적 기반이다.

북 서북지역 출신 개신교인이
중심이 돼 만든 ‘서북청년단’…
제주 4.3 토벌대로 참여해 민간인 학살 자행

서북청년단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악명’ 높은 이름이다. 서북청년단은 1946년 11월 30일 서울 종로YMCA에서 결성대회를 열고 출범한 단체로 공식명칭은 ‘서북청년회’지만 대중들은 이들을 ‘서북청년단’이라 불렀다. 서북청년단은 이후 해방공간에서 좌익세력을 대상으로 암살과 테러를 자행했고, 특히 제주4.3항쟁에 토벌군으로 참여해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 범죄를 저질렀다.

지난 2003년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발간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는 “서북청년회는 4.3사건 발발 전부터 도민들과 갈등을 빚어 사건 발생의 한 원인으로까지 지목받아왔는데, 이승만과 미군은 강경작전을 앞두고 서북청년회를 아예 군경에 편입시켰다. 이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대량 주민 희생을 초래하는 결과를 빚었다. 서북청년회 위주로 경찰이 재편됐고, 군대에는 ‘서청중대’가 따로 편성됐다”며 “이승만과 미군의 후원 아래 제주 사태의 최일선에 서게 된 서북청년회는 군 경 모두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고 밝히고 있다.

4.3항쟁 당시 9연대 보급과 선임하사로 제주에 있었던 윤태웅 씨는 지난 2001년 진상조사위와의 인터뷰에서 “서북청년 이놈들이 고얀 놈들입니다. 처녀를 겁탈하고, 닭도 잡아먹고, 빨갱이로 몰기도 하고. 이놈들이 사건을 악화시켰습니다. 진압을 하라고 했으면 진압만 하지…. 그래서 도망갈 길 없는 주민들이 더 산으로 오른 겁니다”라고 증언했다.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 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서북청년단은 영락교회 청년회가 중심이 돼 만들어진 조직이다. 영락교회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초대회장을 지내는 등 한국개신교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인 한경직 목사가 1945년 세운 교회다. 1945년 12월 베다니전도교회로 시작해 1946년 영락교회로 개명했다. 한경직 목사는 1945년 신의주 제이교회 담임목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소련군이 진주하기 시작하자 신의주 제일교회 윤하영 목사와 함께 ‘기독교사회민주당’을 만들어 대항했다. 이후 지부 결성 과정 등에서 여러 차례 소련 군정과 충돌했고, 결국 1946년 윤하영 목사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오게 됐다.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는 지난 2월 발간한 ‘우리는 너무 몰랐다’에서 “공산당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은 대체로 서북지역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이 제일 먼저 모이는 곳이 교회였다. 우리나라 해방 후 대형교회문화가 생겨나는 현상도 이러한 분단 현실 속에서 잘 설명된다. 영락교회는 서북지역(황해도 평안남북도) 사람들의 집결지였다”고 설명한다.

지난 지난 2011년 성탄특집으로 KBS에서 방영된 고 한경직 목사 관련 다큐멘터리 방송화면ⓒ뉴시스

이런 사실은 한경직 목사가 생전에 한 증언에서도 확인된다. 1982년 규장문화사에서 출간된 ‘한경직 목사’라는 제목의 자서전 형식의 책에서 한경직 목사는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 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되었지요”라고 증언했다.

서북지역에서 월남한 청년들이 반공의식을 가지고 제주4.3학살에 가담한 이유는 무엇일까?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을 역임한 최태육 목사(한반도통일역사연구소)는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통해 1948년 5월10일 열린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가 계기였다고 설명했다. 최태육 목사는 “당시 개신교인들은 남한에 친미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원했다. 그렇지 않으면 소련 공산주의에 먹힌다고 생각했다. 공산주의가 득세하면 개신교가 생존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여겼다. 이미 북에서 이런 경험을 가진 개신교인들은 정치·생존적 입장으로 5.10 선거를 만났다. 이를 방해하는 세력은 없애야 한다는 생각으로 제주 4.3과 여순사건 진압 등에 개신교인들이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1947년 한경직 목사 설교
“공산주의이야 말로 일대 괴물입니다.
이 괴물이 지금 삼천리강산에 횡행하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 괴물을 벨 자 누구입니까?
이 사상이야말로 묵시록에 있는 붉은 용입니다.”

개신교인들이 이런 정치 생존적 입장만으로 학살에 가담할 수 있었을까? 학살의 죄의식을 지워줄 장치가 필요했다. 남한 단독정부, 친미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세력을 악마화한 것이다. ‘교회와 권력’이란 책에서 김진호 목사(제3세계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는 “공산주의자들은 적이고, 그들을 궤멸하면 우리에게 종교적 축복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영락교회를 이끈 한경직 목사가 1946년과 1947년에 한 설교를 살펴보면 서북청년단의 이러한 종교적 배경을 잘 알 수 있다.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가 2009년 발간한 ‘한경직 목사 설교선집1’에 수록된 ‘기독교와 정치’라는 제목의 설교(1946년)에서 한경직 목사는 “신자의 사명은 여기에 있습니다. 천고에 빛나는 진리를 파악한 우리가 철저한 사상교화 운동에 나서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강연회나 토론회를 개최하고, 잡지나 소책자를 발간하는 등 기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전국으로 이 운동을 추진시켜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기독교인은 잠잠합니다. 최선의 정치 이념이 우리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리 퇴영적(退靈的)입니까? 좀 더 주도성을 가집시다. 십자가를 가지고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을 합시다. 전후(戰後)에 각국의 기독교 민주당이 일어나 주도성을 가지고 활발히 움직이는 것을 보시오! 일어나 일합시다!”라며 구체적인 행동을 촉구한다. 한 목사의 이런 설교는 그해 11월 설립된 서북청년회에 영락교회 청년들이 참여하도록 이끄는 계기가 됐다.

1947년에 한 ‘기독교와 공산주의’라는 설교에선 이렇게 말했다.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발표한 공산당 선언 첫 구절은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한 괴물이 유럽을 횡행하고 있다. 곧 공산주의란 괴물이다.’ 저들의 말 그대로 공산주의이야 말로 일대 괴물입니다. 이 괴물이 지금 삼천리강산에 횡행하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 괴물을 벨 자 누구입니까? 이 사상이야말로 묵시록에 있는 붉은 용입니다. 이 용을 멸할 자 누구입니까?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한 목사는 공산주의를 괴물이라고 지칭하며 그 괴물과 싸울 것을 설교를 통해 독려했다. 이듬해 제주4.3항쟁 진압에 서북청년단이 참여한 것도 바로 이런 독려가 바탕이 된 것이다.

제주 4.3 초기 진압 책임자
조병옥 경무부장(개신교인)
“저 사탄의 진영(陣營)이
순순히 굴복하면 몰라도
여전히 그의 악을 계속(繼續)한다면
그들이 무저갱으로 전락하는
운명의 날이 멀지 아니할 것”

제주 4.3항쟁 초기 진압 책임자로 개신교인이었던 조병옥 경무부장은 1948년 4월 20일 서울 경무부경찰공보실이 발행한 ‘총선거와 좌익의 몰락’이라는 책자를 통해 “이제 세계(世界)는 조직된 공산주의(共産主義) 악도(惡徒)의 도량(跳梁)을 막기 위하야 일어나 조직하고 있다 그것은 유엔이오 미 영 불 중의 동심협력(同心協力)이요 로마 왕법(法王)의 명령(命令)이다. 이제 파괴되랴는 인류의 문명을 유지하기 위하야 반공세력(防共勢力)이 나날이 결속(結束)되고 있다. 저 사탄의 진영(陣營)이 순순히 굴복하면 몰라도 여전히 그의 악을 계속(繼續)한다면 그들이 무저갱으로 전락하는 운명의 날이 멀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태육 목사는 지난해 쓴 ‘제주4.3과 기독교인이 돌아봐야 할 것’이라는 글에서 “자유민주주의를 긍정적 자아로, 이에 동조하지 않는 개인과 단체를 부정적 타자로 규정하였다. 그런데 그는 이를 신학화한다”며 “공산주의 진영, 즉 ‘사탄의 진영’은 무저갱으로 굴러떨어질 것이라는 의미이다. 반면에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은 ‘공산주의 악도의 도량’을 막는 세력이다. 그는 신학적 해석을 통해 공산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을 사탄의 진영과 의의 진영으로 발전시켰다”고 설명했다.

제주 4.3항쟁 초기 진압 책임자 조병옥 경무부장은 개신교인이었다. 사진 왼쪽부터 조병옥, 김동성, 장면(1949년 유엔한국대표단)ⓒ국가기록원

서북청년단을 비롯해 북에서 내려온 개신교인들에게 있어 반공은 단순히 사상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의 ‘붉은 용’과 ‘사탄’을 비롯한 악마의 세력과의 전쟁이었고, 빨갱이 낙인이 찍히면 가차 없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좌익 전력자를 전향시킨다는 명목으로 만든 보도연맹 결성을 주도하는 등 평안남도 출신으로 공안검사로 유명했던 오제도 검사와 제주 토벌대 출신인 채명신 장군과 이세호 장군이 영락교회에서 장로를 지낸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
“공산당과 싸우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사탄과의 싸움”

이러한 극우적 신앙은 고스란히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2011년 8월30일 장충체육관에서 재향군인회(회장 박세환)와 국민행동본부(본부장 서정갑), 금란교회(감독 김홍도), 청교도영성훈련원(전광훈 목사)등 보수 단체와 대형교회 신도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반공·애국국민총궐기대회에서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는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고, 목회만 하면 되지 무슨 정치운동에 참가하고 앞장서냐고 말하는 이 있다. 나도 목회만 하고 싶은데 공산당과 싸우는 것은 정치가 아니다. 사탄과의 싸움”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만들어진 보수개신교 정당인 기독자유민주당의 창당준비대회 성격으로 열린 이날 행사에서의 이런 발언은 극우적 성향 개신교인들의 정치 활동이 과거 서북청년단처럼 마치 사탄의 세력과의 전쟁을 치르듯 이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홍도 목사는 역시 북의 서북지역인 평안북도 출신의 피난민이다.

김용옥 교수는 ‘우리는 너무 몰랐다’에서 “서북청년단의 특징은 반공정신의 맹렬성과 맹목성에 있다. 북한에서 당한 저주를 풀기 위해 ‘빨갱이’라는 이름만 들으면 무조건 폭력과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북한에서 내려온 이 열혈한 정년들을 이승만은 정권장악의 가장 확고한 지지세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라며 “이승만은 이 서북청년단의 인력을 남한 사회의 반공화를 위한 프론티어로 활용했다. 며칠간의 훈련만 받으면 곧바로 경찰과 군인의 계급장을 달아주었다. 겉으로 보면 버젓한 군인이고, 경찰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월급이 지급되질 않았다. 마음대로 약탈하고, 겁탈하고 죽이고 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이다. 서북청년단에 관한 한, 아무런 룰이 없었다. 이 서북청년단의 아버지가 바로 조병옥이고, 장택상이었다. 빨갱이라면 전후좌우 맥락을 무시하고 때려잡는 사람들, 이들은 대체로 반공의 투사들이었고, 열렬한 예수쟁이였고, 인간 평등관을 거부하는 서북의 지주자제들이었다”고 밝혔다.

개신교 ‘진보’와 ‘보수’
모두 가졌던 반공의식…
민주화운동 등을 통해 화해와 변화

그런데 반공의식은 우리가 흔히 ‘보수’라고 칭하는 개신교 일부 진영만의 의식이 아니라 ‘진보’까지 포함해 한국개신교의 보편적인 의식이었다. 진보적 신학의 대표적 인물로 한신대와 기독교장로회를 세운 김재준 목사를 비롯해 강원룡 목사, 함석헌 선생, 안병무 박사 등 1970년대부터 반독재투쟁에 나선 개신교계 인물들도 강한 반공주의자들이었다. 이들 역시 해방 직후 북에서 소련 등에 의해 교회가 탄압받던 현실을 직접 경험했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과거 안병무 박사가 서북청년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한 의혹이 있다고 과거 말지와 오마이뉴스 등의 보도를 인용해 기록했지만 사실이 아님이 확인돼 삭제했습니다. 박승렬 목사가 제시한 자료를 확인한 결과 과거 기사들에 안병무(安炳茂) 박사가 서북청년회 부위원장으로 언급된 것은 비슷한 한자 이름을 가진 인물인 宋秉武(송병무)의 오독이었음을 확인했습니다.)

1988년 3월25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문익환 목사가 육촌동생 문익준, 문순옥 등 친척을 분단 이후 처음으로 만나는 모습.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 개신교 진영의 반공 의식은 시대적 변화를 겪으며 바뀌었다.ⓒ통일의집 제공

하지만 개신교의 반공의식은 시대가 지나면서 조금씩 변화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지난 1988년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을 통해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종교적인 신념처럼 우상화하여 북한 공산정권을 적대시한 나머지 북한 동포들과 우리와 이념을 달리하는 동포들을 저주하기까지 하는 죄를 범했음을 고백한다. 이것은 계명을 어긴 죄이며, 분단에 의하여 고통받았고 또 아직도 고통받고 있는 이웃에 대하여 무관심한 죄이며, 그들의 아픔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치유하지 못한 죄”라고 고백했고, “남한 그리스도인들은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북한에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고, 분단이 고착화되는 과정에서 북한 공산정권에 대하여 깊고 오랜 불신과 뼈에 사무치는 적개심을 그대로 지닌 채 반공 이데올로기에 맹목적으로 집착해 왔다”고 반성했다.

이듬해인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평화통일방안을 협의하는 등 분단 극복을 위한 물꼬를 열었다. 문 목사는 만주에서 태어나 북을 거쳐 월남했고, 한국전쟁 당시엔 유엔군 통역관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개신교계의 이런 변화에 대해 최태육 목사는 “반공주의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자체적으로 극복해냈다고 보긴 힘들다. 해외 통일 운동과 197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이어진 민주화운동과 학생운동의 영향과 함께 젊은 목회자들의 변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수개신교, 한기총 만들며 반공의식 강화
“영락교회는 청년회와 대학생회를 통하여
서북청년의 반공투쟁에 관여하였고,
이것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개신교 일부에서 과거를 반성하고 평화와 화해의 길을 모색하는 동안 독재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성장한 보수적 성향의 개신교 교단들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1988년 선언에 반대해 198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을 만들었다. 창립준비위원장을 맡아 한기총 건설을 주도한 사람은 바로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였다. 이후 보수개신교 진영의 반공의식은 더욱 견고해졌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개신교 내부에서도 서북청년단 활동을 사죄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수개신교에선 이들을 건국세력으로까지 추켜세우고 있다.

2012년 4월 ‘한국교회사학회’와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한경직과 대한민국 건국운동:1945-1948’을 주제로 발표한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는 “우익청년운동의 핵심으로 활동한 것이 바로 서북청년단이었다. 이북에서 자유를 찾아 남하한 서북청년들은 남한에서 좌익이 활개를 치고, 정치적으로 혼란한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영락교회는 이런 서북청년단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영락교회는 청년회와 대학생회를 통하여 서북청년의 반공투쟁에 관여하였고, 이것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고 주장했다.

지난 3월1일 한국기독교총연합 주최로 서울 광화문 에서 열린 ‘문재인 탄핵 3·1절 국민대회’에서 대표회장인 전광훈 목사가 발언하고 있다. 시대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보수적 성향의 개신교인들의 반공의식은 변하지 않고 있다.ⓒ한국기독교총연합 홈페이지

이런 시각은 뉴라이트의 역사 인식과도 일치한다. 뉴라이트 역사학자 등이 중심이 돼 출간한 ‘대한민국 정체성 총서’ 18번째 책으로 ‘서북청년회’가 출간되기도 했다. 이 책은 “서북청년들은 북한의 전체주의 체제로부터 탈출한 월남민이었기 때문에 전투적인 반공주의자들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의 말대로, 그들이 없었으면 치안유지도, 건국도 할 수 없었던 중요한 세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건국세력의 하나인 서북청년들의 존재에 대해 거의 완전히 잊어 왔다. 그들은 해방 직후에는 건국운동가로서, 그리고 6.25전쟁 때는 국군이나 유격대원이나 청년단원으로 좌익과 북한군에 대항해 싸웠다. 하지만 대다수는 국가로부터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 가족이 없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경우도 많았다”며 서부청년단을 숨은 건국 영웅으로 추켜세웠다.

“과거 반성 없는 개신교는 언제든지
극우주의에 빠질 수 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극우적 성향의 개신교인들은 대한민국은 과거 서북청년단 등 개신교 세력이 개신교인인 이승만 박사와 함께 세운 기독교국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기총 대표회장인 전광훈 목사가 지난 2월15일 열린 취임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세울 때 저항했던 남로당 찌꺼기들하고, 북에서 날라온 주사파 찌꺼기들이 붙어서 청와대를 점령하고, 대한민국을 해체하려 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인 것도,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예수가 세운 나라다. 결단코 그들에게 내어줄 수 없다. 고려연방제로 갈 수 없다. 성도 여러분, 이 나라를 지키자”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문제는 이런 왜곡된 역사 인식이 일부 개신교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개신교 일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반공주의 시대에 인식이 여전히 머물러 있다. 최태육 목사는 “개신교가 서북청년회 활동 등 과거의 잘못을 아직 반성하지 않았다. 개신교인 대부분이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모른다. 나이 든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젊은 개신교인들도 마찬가지”라며 “개신교는 언제든지 극우주의에 빠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권종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