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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세종의 마음 씀씀이

조직을 지키려면 ‘충신’이 있어야 한다고들 한다. 세종도 그렇게 생각했다. 고려가 망할 때 충신과 의사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왕은 늘 마음이 불편하였다(실록, 세종 13년 3월8일).

고심 끝에 세종은 고려의 충신을 현양하기로 마음먹었다. 왕은 당대 최고의 역사가 설순과 더불어 고려 말 여러 인물의 행적을 따져보았다(세종 12년 11월23일). 설순은 길재를 뛰어난 충신이라고 손꼽았다. 그러면서도 그 학문은 빼어나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세종은 설순의 견해에 동의하면서도, 학문보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라며 행실에 비중을 뒀다.

“길재의 충성스러운 행적이 귀하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벼슬을 추증하였고, 그 아들에게도 관직을 주었다. 고려의 귀족은 누구나 조선왕조에 합류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길재는 가문이 한미하여 생활이 풍족하지 못한데도 애써 벼슬을 사양하였다. 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후세가 이런 사실을 알게 하라.”

이어서 세종은 정몽주의 행실도 기렸다. “태종께서는 정몽주가 충의를 위해 목숨을 버렸다는 점을 잊지 않으셨다. 그리하여 그를 호평하고 자손에게 상도 주셨다. 정몽주 역시 고려 충신으로 이름을 기록하는 것이 옳다.” 부왕 태종이 제거한 정몽주를 세종은 고려 최고의 인물로 손꼽았다. “정몽주는 참으로 성품이 순후하고 진실하였다. 그런데 길재는 성품에 모난 점이 없지 않았다.” 집현전 학사 권채는 세종의 평가에 공감하면서, 고인이 된 대학자 권근도 정몽주를 지극히 존경했다는 말을 덧붙였다(세종 13년 3월8일). 권근과 권채는 숙질간이었다.

두루 살핀 끝에 세종은 설순에게 이렇게 지시하였다. “정몽주는 죽을 때까지 절개를 지켜 변할 줄 몰랐다. 또 길재는 절조와 마음을 잘 보존하여 관직을 줘도 상소를 올리고 물러났다. 그대는 둘의 모습을 <충신도>에 올리고 그들을 기리는 문장을 지으라.”(세종 13년 11월11일)

고려 말의 대학자요, 정몽주의 스승이었던 목은 이색도 왕의 눈길을 끌었다. 세종은 그의 됨됨이를 깊이 알고자 했다(세종 13년 3월8일). 마침 조정에는 이색과 친분이 있었던 이긍이란 신하가 있어, 보고 들은 바를 증언하였다. 이색은 문장에 재주가 뛰어났으나, 관리로서는 부족한 점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박식한 권채는 이색의 또 다른 면모를 떠올렸다. 공민왕이 노국대장공주를 추모하는 마음에서 지나치게 큰 건물을 지으려 하자 유탁이란 대신이 반대하였다. 공민왕은 화를 내며 유탁을 죽이려 하였는데, 이색이 간언하여 그는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세종은, 이색에게는 누구도 따르지 못할 장점이 있었다며 찬탄하였다.

사실 이색과 정몽주 등에게도 심각한 문제점이 없지 않았다. “내 생각에 고려 때 이색과 정몽주도 그러했고, 이 나라 초창기의 대신들도 모두 똑같은 잘못이 있었다. 그들은 당파를 만들어 상대에게 피해를 많이 주었다.”(세종 25년 6월22일) 세종은 그들의 결함을 똑똑히 알고 있었음에도, 장점으로 단점을 가려주었다. 남의 잘못이 눈에 띄기만 하면 부풀리고 헐뜯는 데 익숙한 소인배들은 감히 따라갈 수 없는 넉넉한 마음가짐이었다.

사족: 오늘자(2020. 11. 19) 어느 일간지에 실은 제 짤막한 글입니다.

조선의 아버지들을 아십니까?

조선의 아버지들이란 책을 낸 적이 있습니다. 어느 기자 선생님과 함께 이 책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질의 응답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역할을 고민하는 벗님들에게 참고가 되실지 몰라서 실어둡니다.

Q 조선시대 하면 유교, 유교 하면 가부장제가 먼저 떠오릅니다. 그러나 성별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을 존중했다는 내용을 읽자니 우리가 조선시대 사람들을 오해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조선시대의 아버지 이야기를 책으로 내신 이유는 뭘까요?

A 맞습니다. 그런 오해가 없지 않았지요. 사실 가부장적 사고라고 하는 것은 전근대사회의 보편적 특성이기는 하였습니다. 유교경전도 그렇습니다만, 특히 <<구약 성경>>이나 <<코란>>은 가부장제도의 이상을 담고 있어요. 그런데 저는 ‘한발 더 깊이’ 들어가 보기를 원했습니다.

실제로 조선시대의 사회를 움직인 아버지들의 내면으로 파고 들어가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에게는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점들이 많았어요. 저도 그렇습니다만, 이 시대에는 아버지의 정체성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 우리들로서는 제가 만난 12명의 조선시대 아버지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매력적이라고 봐요. 그들이 애써 추구한 인생의 가치는 지금도 유효한 것이 않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조선의 아버지들은 자식들을 끔찍이도 존중하고 사랑했어요.

전통적으로 자식들은 아버지로부터 사회 및 인간과 관계하는 방법을 비롯해 삶에 필수적인 다양한 지혜를 배워왔지요. ‘아버지의 부재’라고 하는 오늘날의 보편적 현상은 그런 점에서 정말 유감이죠. 아버지에게서 배울 기회를 놓친다면 온전한 인간으로 성숙하는 데 엄청난 손실이 따르지요. 아버지의 자리가 사라진 시대는 위태롭기 짝이 없어요. 아버지가 가정과 사회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조선시대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우리의 마음이 절로 훈훈해질 것입니다.

Q ‘충(忠)’을‘자신을 포함한 일체의 사물에 진심을 다하는 것’으로 말씀하신 게 인상깊었습니다. 보통 ‘충’은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도리로만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조선시대 아버지들이 구하려고 했던 ‘충’은 무엇일까요?

A 충성을 바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요. 얼마 전에 인기를 끌었던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이 아들에게 들려준 말씀이 기억나시는지요. 내가 충성을 바칠 최고의 대상은 백성이다, 다음은 나라이다. 임금은 그 다음일 뿐이다. 이렇게 말한 것으로 나오지요. 이 대사는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아무리 찾아보았댔자 안 나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보기에 그 말은 이순신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한 것이지요.

사실은 말이죠. <<맹자>>에 바로 그런 말이 있습니다. 이른바 ‘4서3경’ 곧 유교 경전을 관통하는 사상이 바로 그것이지요. 우리가 잘 몰랐던 부분이지요. 임금보다는 왕조가, 왕조보다는 백성이 더 소중하다는 것인데요. 한 발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유교적 교양을 추구하는 선비들에게는 “내”가 제일 중요한 충성의 대상이었습니다. 군자가 되려면 결코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되는 것이었어요. 진심을 다해 자신에게 정성을 다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야 했어요. 그랬기에, 조광조는 중종에게 ‘근독(謹獨)’, 곧 홀로 있을 때를 삼가라고 주문했지요. 제가 이 책에서 만난 김집 같은 학자는 호를 신독재(愼獨齋)라 하여, 홀로 있을 때를 삼간다는 호를 쓰기도 했지요. 이러한 사고의 연장선상에서 훗날 동학의 스승들은, 자신을 비롯하여 뭇 사람과 사물을 하늘처럼 받드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지요.

Q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에 국한하지 않고 정약용이 천주교를 받아들인 과정이라든지, 영조와 정조가 처한 정치적 상황 등 역사적인 배경이 소개됩니다. 아버지 자신이 훌륭한 경우도 있었겠지만, 시대 상황이 부모 자식 관계에 영향을 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조선 시대의 특정한 상황 때문에 아버지상이 현재와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요?

A 시대상황에 따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바뀝니다. 시대상황 뿐만이 아니지요. 같은 시대라도 개개인의 처지에 따라서도 많은 차이가 있어요. 엄밀한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가 다른 처지요, 다른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처지에 완벽하게 일치하는 과거의 경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일은 하나의 참고사항일 따름이지요.

그런데 과거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우리의 사고가 확장됩니다. 한층 깊어지기도 하지요. 조선시대의 아버지들은 우리에게 유익하고 흥미로운 ‘타산지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Q 김숙자와 김인후 등 상대적으로 익숙하지 않은 역사적 인물도 보입니다. 간단히 설명해 주시자면.

A 이분들도 당대에는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은 학자들이었어요. 제자들도 많이 따랐어요. 김숙자는 조선 초기 사림파의 영수로 이름난 점필재 김종직의 아버지이자 스승이었지요. 길재의 수제자이기도 하였고요. 김숙자는 청년시절 이혼한 일이 있었고, 때문에 벼슬길에서 오랫동안 소외되었지요.

하서 김인후는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던 16세기 최고의 성리학자요, 시인이었어요. 이분은 인종의 동궁시절 스승으로도 유명했고, 기묘사화로 쓰러진 조광조의 복권운동을 처음으로 시작한 것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지요. 그러나 곧 조정을 떠나 시골에 묻혀 학문과 문장을 닦기에 전념했어요. 송강 정철의 스승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여로 모로 탁월한 선비들이 많았어요.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의 우리로서는 그들 가운데 겨우 몇몇의 인물이나 알고 있는 정도입니다.

Q 이순신 장군은 군법을 어기는 부하의 목을 가차없이 베는 이미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가족에게는 너그럽거나 자상한 모습을 보이는데요. 모순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A 잘 생각해보면 그것이 모순은 아니지요. 장군의 군대는 전쟁 중이었고, 그래서 엄한 기율이 요구되었어요. 기강이 흐트러지면 모든 것이 끝이었지요. 사랑(仁)을 토대로 한 가족관계와는 근본적으로 성질이 달랐어요. 한데요. <난중일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순신의 부하사랑도 대단하였어요. 그는 마치 아버지로서 또는 어머니로서 자식들을 돌보듯 하였습니다. 군사들에게 팥죽을 쑤어 먹이고, 등을 다독이며 흐뭇해하였어요.

Q 영조와 사도세자는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좋은 일을 행하라고 상대에게 권하지 않아야 한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잔소리와 격려, 조언과 비난을 구분하기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A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판단의 중심을 아버지가 아니라, 자식 쪽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아들이나 딸이 보기에 비난으로 들리면 그건 그렇다는 말씀이지요.

Q 지금 시대의 아버지들이 이 책을 통해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A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자상하고 따뜻했다는 점이지요. 가령 퇴계 이황은 자식이 잘못을 저질러도 함부로 야단치지 않았어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편지를 썼지요.

둘째, 말로만 훈계하지 않고 몸소 모범을 보였어요. 아버지 정약용이 18년간의 유배 기간 동안 좌절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여 500권이 넘는 저술을 남김으로써, 아들들에게 ‘폐족’의 위기를 헤쳐 나갈 길을 제시하지 않았든가요.

셋째, 자식을 존중하고 예를 다했다는 점도 새롭지요. 아버지 김장생은 아들이 무슨 질문을 하면 병상에 누워 있다가도 몸을 일으켜 앉은 채 대답했거든요. 가까운 부자사이라도 서로에게 예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어요.

이밖에도 배울 점이 참 많지요. 지면 관계상 일일이 다 적을 수 없어 유감입니다.

그런데요. 아버지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른’으로 사는 것이 아닐까요. <<조선의 아버지들>>에서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인생의 좌표”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선의 아버지들』(백승종, 사우, 2016; 세종우수교양도서; 경기도 평택시 한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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