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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g Cheol Lee 교수

어제 잠깐 언급한 강연 원고입니다. '한국사회의 갈등'이란 주제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전혀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예민한 주제입니다. 입장이 다르더라도 읽어주시면 고맙고, 댓글 달아주시면 더 고맙게 생각합니다. 한림대 부설 태동 고전연구소에서 초청 강연과 대담 형태로 진행됩니다. 서양 철학자와 동양철학자 한 사람씩 강연을 하고 나중에 그 내용을 가지고 대담을 하는 형식입니다. 원고가 길기 때문에 그대로 읽지는 않고 별도로 PPT 강연 원고를 사용하게 될 겁니다. 연구소 양해를 구해서 벗님들에게 미리 올립니다.

한국사회의 갈등과 『안티고네』

이 종철(철학박사/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1. 20세기의 한국사의 전개를 돌이켜 보면 참으로 신산(辛酸)하다. 이 민족의 고통이 집약되고 점철된 역사다. 일제의 식민지 치하에서 수탈을 당하고, 전후 강대국들의 합의 하에 타율적으로 해방이 되면서 분단이 되었다. 해방된 지 5년 만에 같은 민족끼리 전쟁을 치루면서 전국토가 초토화되었다. 전쟁과 그 이후 분단의 경험은 70년이 지난 이 시점에도 대립과 갈등의 깊은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2. 전쟁 이후 그리고 수십년 동안 지속된 냉전 체제 하의 한국에서 분단과 반공 이데올로기가 억압적인 통치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면서 독재체제의 구축에 악용되었다. 이승만 정권이 그랬고, 박정희와 전두환 정권들이 그랬다. 그럼에도 한국의 민주화 경험은 역동적으로 독재와 억압을 헤쳐왔다. 60년 4.19 혁명과 70년대 반유신 반독재 투쟁, 그리고 87년도의 민주화 운동, 최근의 촛불 시위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상징하는 뚜렷한 족적이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의 경제발전도 눈부실 만큼 비약적으로 이루어져왔다. 수출 주도, 재벌 위주의 경제 성장 정책에 대한 비난이 커도 이런 경제 발전 시스템이 한국 사회의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전체를 개방화하고 다양화한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경제는 90년대 말에 IMF를 겪고 신자유주의의 물결에 급격하게 휩쓸리면서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불평등의 골을 깊게 했다. 21세기로 들어서면서 한국사회의 고령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사회 체제의 탄력이 약해지고, 다문화와 환경 등 다양한 부문에서 새로운 갈등들에 노출되고 있다.

3. 이런 한국사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갈등을 크게 이념 갈등과 지역 갈등 그리고 세대 갈등을 꼽을 수 있다. 분단시대는 반공을 억압적인 통치이데올로기로 악용하는 빌미가 되었다. 과거의 대부분의 독재 정권은 반공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으면서 반대 목소리를 억압하는 데 활용했다. 반공 이데올로기는 민주화가 이루어진 21세기에도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통진당 해산 사건이 그 경우이다. 정권의 미운털이 박힌 공당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해산하고 소속 국회의원은 현재 7년째 옥살이를 하고 있다. 그만큼 반공 이데올로기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1990년대 초원복집 사건에서 나온 '우리가 남이가'라는 표현은 한국사회에 만연된 지역연고주의를 잘 말해준다. 지역주의가 나름대로 정치적 이유도 갖고 있지만 어느 지역에 사느냐는 거의 우연에 가까운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지역주의를 정치인들은 선거 때마다 시시때때로 악용하면서 지역감정을 부추긴 면이 크다. 예전보다는 많이 희석화되었지만 여전히 대국 경북과 전남 광주의 지역주의는 강하다. (양 쪽의 지역주의를 동일한 차원에 놓을 수 있는가?) 한국의 자본주의가 급성장을 하면서 상대적으로 소홀시되었던 노동권 역시 집단화되면서 힘을 키웠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겪은 IMF와 그 이후 극복 과정에서 새로운 불평등과 비정규직의 문제는 자본에 비해 열악한 노동 현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한국 사회는 빠른 사회 발전 이상으로 급격하게 고령화되면서 세대 간의 갈등 문제도 적지 않게 키우고 있고, 외국 노동자들의 급격한 유입으로 인해 다문화 갈등의 소지도 많이 안고 있다. 이렇게 많은 부문에서 나타난 갈등들은 잠재적이건 현실적이건 한국 사회를 극단적으로 분열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4. 오늘 날 한국 사회에서 갈등과 대립이 보여주는 뚜렷한 현상은 그것들이 구조적으로 화해 불가능할 정도로 진영논리화 되는 점에 있다. 이제는 사회의 어떤 문제가 되었든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 등으로 갈라져서 피터지게 싸우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한 편에는 성조기와 이스라엘 국기를 든 태극기 부대와 엄마 부대가 있고, 다른 편에서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걸면서 정권 사수를 위해 일체의 내부 비판을 거부하는 지지세력들이 서로 간에 양극화된 대립과 갈등을 격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갈등은 촛불 시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통해 탄생한 문 정권하에서 오히려 더욱 극심한 양상을 보인다. 2019년 조국 교수를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하면서 본격적으로 대립했던 진보와 보수 간의 갈등은 나라를 극도로 분열시키고 있다. 지금은 이른바 법의 이름을 걸고 검찰 권력과 법무부까지 권력 투쟁을 일삼고 있다. 이런 양극화된 현실에서 중간지대의 목소리는 회색분자로 치부되고 오로지 아생살타(我生殺他)의 칼날만 번뜩이고 있다. 만일 이런 갈등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한국사회는 앞으로 점점 더 큰 어려움에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가뜩이나 분단된 남북 간의 갈등도 심한데 사회 내부에서 지금처럼 갈등과 대립을 키워나간다면 대한민국호의 미래를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지금과 같이 양극화된 진영논리는 첫째로 선과 악, 옳고 그름의 문제를 상대화시킴으로써 모든 문제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빌미가 될 수 있다. 둘째로 진영논리는 문제의 차원을 발전적으로 해소하지 못하고 추상적인 부정만을 일삼을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는 오로지 손바닥 뒤집기만 있을 뿐 미래로의 전진이나 발전이 없다.

5. 우리는 일견 화해가 불가능한 현재의 대립과 갈등을 좀 다른 차원에서 접근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갈등에 대한 분석들은 사회학자나 정치학자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인문학적 시각에서 이러한 갈등을 조망하고 새로운 성찰의 기회를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접근을 현재의 갈등과 매우 유사한 형태로 제시한 고대 그리스 비극 작품인 『안티고네』를 통해 시도해보고자 한다. 그리스 비극 시인으로 알려진 소포클레스의 작품 『안티고네』는 서구의 고전으로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있다. 이 작품은 대학로에서 잊을만하면 리바이벌되는 고전적 비극이다. 『안티고네』는 조국을 배신한 폴리네이케스와 수호하려는 에테오클레스가 왕권을 둘러싸고 전쟁을 벌이다 둘 다 전사하는 데서 시작한다. 문제는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데 있다. 동서양과 고금을 막론하고 장례는 혼례 만큼이나 인륜지 대사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호머의 『일리아드』에서 트로이의 명장 헥토르를 죽인 영웅 아킬레우스는 분노감으로 헥토르의 시신을 전차에 달고 다니면서 모욕하고 훼손한다. 그 날 밤 아킬레우스에게 트로이의 늙은 프리아모스 왕이 찾아와 아비의 비통한 심정을 이야기하면서 자식의 시신을 돌려줄 것을 간청한다. 아킬레우스도 고향에 계신 부모를 생각하며 차마 이 청은 거절하지 못한다. 시신을 앞에 두고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모스는 눈물을 흘리며 화해한다. 그만큼 시신 처리 문제는 고대 그리스 사회의 인륜 사에서 중대한 문제이다. 그런데 새로운 왕 크레온은 반역자의 장례를 치러주는 자는 똑같이 들판에서 까마귀밥이 되리라는 명령을 내린다.

에테오클레스는 우리 도시를 위하여 싸우다가 모든 면에서 뛰어난 장수로서 전사하였으니, 그를 무덤에 묻어주고 지하의 가장 훌륭한 사자(死者)들에게 어울리는 온갖 의식을 베풀 것이오. 그러나 그와 형제간인 폴뤼네이케스는, 내 말하노니, 추방에서 돌아와 조국 땅과 선조들의 신들을 화염으로 완전히 불사르고, 친족의 피를 마시고, 나머지는 노예로 끌고 가려고 하였으니, 그와 관련하여 나는 도시에 알리게 했소이다. 아무도 그에게 장례를 베풀거나 애도하지 말고, 새 떼와 개떼의 밥이 되고 치욕스러운 광경이 되도록 그의 시신을 묻히지 않은 채 내버려두라고 말이오.( 『안티고네』, 195-205)

5. 국법을 수호하는 통치자의 입장에서 이런 명령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만일 조국을 반역한 자와 그 조국을 지키려다 죽은 자를 똑 같이 취급한다면, 통치 질서가 더는 지켜지기 어렵고 국가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통치자는 사람들의 행위와 관련해 옳고 그름, 정과 부정의 차이를 명백히 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월권하여 법을 짓밟고 자신의 통치자들에게 명령하려 든다면, 나로서는 결코 그를 칭찬할 수 없다. 누구든지 도시를 세운 자에게는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옳은 일이든 옳지 않은 일이든 마땅히 복종해야 한다.”( 『안티고네』, 663-668). 그런데 죽은 자들의 오누이인 안티고네는 이러한 왕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역하면서 죽은 오라버니 폴리네이케스의 장례를 치러준 것이다. “네가 감히 법을 어겼단 말이냐”라고 질책하는 크레온의 말에 대해 안티고네는 당당하게 자기 행동을 정당화한다.

"네, 그 포고를 나에게 알려주신 이는 제우스가 아니었으며 하계(下界)의 신들과 함께 사시는 정의의 여신께서도 사람들 사이에 그런 법을 세우시지는 않았기 때문이지요. 나는 또 그대의 명령이, 신들의 확고부동한 불문율들을 죽게 마련인 한낱 인간이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 불문율들은 어제 오늘에 생긴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 있고,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안티고네』, 450-460)

크레온이 볼 때 안티고네의 이런 행동은 방자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안티고네는 단순히 왕의 명령을 어긴 돌발적인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죽은 자는 하데스의 세계에 속하며, 따라서 그 세계에 시신을 돌려주기 위해 매장하는 풍습은 죽은 자에 대한 최대의 예우이다. 죽은 자를 매장하는 이 최후의 의무는 완전한 신의 법에 속하고, 가족이 할 수 있는 적극적인 인륜적 행동이라 할 수 있다. 크레온이 이런 하데스의 법을 무시하고 국가의 법과 질서를 고수하기 위한 명령을 내린 데 반해, 안티고네는 아무리 국가의 반역자일지언정 장례를 치러주는 것이 천륜에 부합된다고 생각한다.

6. 그들의 생각은 너무나 완고해서 서로 한 치도 물러서려 하지 않는다. 크레온과 안티고네의 대립은 파국을 충분히 예상하면서도 서로 마주 보고 달리는 기차와도 같다. 제 3자가 중재를 해보려고 무진 애들을 쓰지만, 전혀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안티고네의 약혼자이자 크레온의 아들인 하이몬은 자살하기 전에 아버지 크레온을 설득하려고 무진 애를 쓴다. “마음속에 한 가지 생각만 품지 마십시오. 아버지 말씀만 옳고 다른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안티고네』, 705-707). 그렇다. 나만이 옳고 다른 사람이 옳지 않다고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각자 자기만의 잣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 포스트 모던한 상대주의는 오늘날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오래 전에도 사람들은 다들 자기식으로 세상을 생각하고 재단했던 것이다. 이 때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모르기 때문에, 쉽게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보다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잣대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동양의 고전에도 이런 말이 나온다.

“나와 자네가 논쟁을 한다고 하세. 자네가 나를 이기고 내가 자네를 이기지 못했다면, 자네는 정말 옳고 나는 정말 그른 것인가? 내가 자네를 이기고 자네가 나를 이기지 못했다면, 나는 정말 옳고 자네는 정말 그른 것인가? 한쪽이 옳으면 다른 한쪽은 반드시 그른 것인가? 두 쪽이 다 옳거나 두 쪽이 다 그른 경우는 없을까? ... 누구에게 부탁해서 이를 판단하면 좋을까?”(『장자』)

옳고 그름을 쉽게 판단하기 어려울 때, 가장 큰 지혜는 서로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고 하는 일종의 ‘개방성’에 있고, 가장 큰 어리석음은 자신의 무오류를 주장하는 완고함의 ‘폐쇄성’에 있다. 그래서 힘 있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귀를 열어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겸허하게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지도자로서 가장 어리석은, 아니 그 이상으로 사악한 덕은 남의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 고집불통이다. 과거에도 그럴진대, 오늘 날처럼 개방된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안티고네』,의 크레온에게서 바로 이런 완고함과 폐쇄성을 본다.

크레온은 말한다. “내가 이 나이에 이런 풋내기에게서 사리를 배워야 한단 말이냐?”( 『안티고네』, 726-727) 그는 사랑하는 자식 하이몬의 충고조차 단호하게 거부한다. 왕은 자신의 권위만을 완고하게 고수한다. 게다가 이런 충고를 받아 들여 안티고네의 태도를 허용하는 것을 한낱 비천한 여인에게 굴복하는 것만큼이나 싫어한다.

우리는 질서를 가져다주는 것을 보호하고, 결코 한 여인에게 져서는 안 된다. 꼭 그래야 한다면, 우리가 한 여인에게 졌다는 말을 듣느니 차라리 한 남자의 손에 쓰러지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안티고네』, 677-680)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겉으로는 국가의 법질서 수호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우지만, 그 이면에는 남자가 어찌 여자에게 질 수 있겠느냐는 생물학적 치졸함이 감추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각자 자기 생명을 지키려는 생존 본능의 의지, 자기 관할 영역을 양보할 수 없다는 원시적 본능이 더 크게 작용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생물학적 본능은 모든 생명체에 공통된 것인데 어떻게 인간이라고 다르겠는가? 하지만 말이다. 달리 생각해보면, 도대체 인간적인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런 원시적 본능, 생물학적 자존심 때문에 못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그런 것들에도 불구하고 감히 손을 내밀 수 있고 따듯이 품어줄 수 있는 데서 인간 정신의 고결함과 위대함이 있지 않겠는가? 도대체 동물과 인간의 차이가 무엇이겠는가? 생물학과 윤리학이 갈라지는 지점이 어디에 있는가?

결국 이렇게 자신의 입장만을 완고하게 고수하면서 대립하던 크레온과 안티고네는 함께 몰락하고 만다. 감옥에 갇힌 안티고네가 죽자 그 약혼자인 하이몬과 어머니 에우리디케가 따라서 자살을 하고, 크레온 왕은 하루 아침에 아들과 처를 잃고서 망연자실한다. 하지만 후회는 너무 늦게 오는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21세기 한국사회의 갈등에 대해 어떤 가르침을 줄 수 있을까?

9. 오래된 고전인 이 작품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고 분분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저 유명한 『시학』에서 비극이 주는 연민과 공포, 영웅적 인간들의 희생 그리고 파국을 통해 느끼는 카타르시스와 같은 정서적 효과를 강조한다. 이런 정서적 효과가 전 시대의 종교의 역할을 대신해서 폴리스를 하나로 결속하고 시민들의 마음을 위무하기도 한다. 『안티고네』는 이런 비극의 전형이다. 다른 한 편, 남성인 크레온과 여성 안티고네의 대립 구조에 입각해서 가부장적 원리와 모성적 원리의 충돌로 보기도 하고, 안티고네를 남성이자 왕의 명령에 당당히 맞서는 페미니스트적 여성의 전형으로 보기도 한다. 법철학에서는 왕의 명령과 천륜의 대립을 인간의 법과 신의 법, 실정법과 자연법이 대립하는 고전적 케이스로 보기도 한다. 정신분석학의 새로운 전통에서는 죽음의 무덤을 향해 비장하게 걸어가는 안티고네에게서 죽음의 미학, 숭고의 아름다움을 읽으려 한다. 우리 역시 대의를 위한 죽음을 아름답게 보는 안티고네의 태도를 죽음의 충동과 연관시켜 살펴 본 바 있다. 혹은 전통적인 여성성의 전형으로 보는 해석과 달리 아버지 오이디푸스와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삶과 자신을 일체화하려는 안티고네에게서 동성애라는 코드를 읽으려는 시도도 있다(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는 같은 어머니의 자궁을 공유한 형제이자 부녀지간이다.)

10. 아무튼 『안티고네』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장르와 새로운 영역이 개척될 정도이다. 하지만 나는 이 작품을 특별히 헤겔의 역사철학적 시각에서 해석해 보고자 한다. 말하자면 『안티고네』라는 작품은 그리스 인륜 공동체를 움직이는 두 가지 원리의 갈등과 충돌을 해결하지 못해 필연적으로 해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그 이후 등장한 로마적인 법치국가에서 새로운 갈등 해결의 방법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해석에 빗대 작금의 한국 사회를 해석해 보고자 한다. 작금의 한국사회 역시 좌파와 우파, 보수와 진보 등 쉽게 화해하기 어려운 진영논리에 빠져 무한 대립하고 있다. 이런 대립은 내부적으로 매개하고 조정하거나 화해 불가능할 정도로 극단을 달리고 있다. 그래서 똑같은 사안을 대하면서도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해법을 찾기 힘들 정도로 감정적이고 정서적으로까지 대립하고 있다. 게다가 진영논리의 대립은 지역 간의 갈등, 세대 간의 갈등, 그리고 빈부 간의 갈등들을 포괄하면서 우리 사회 모든 부문에서 대립하면서 상대 진영의 실체를 부정하고 하고 있다. 만일 한국사회가 이런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고령화와 경제 성장의 정체와 겹치면서 미래의 전망을 어둡게 할 수도 있다. 그만큼 당면한 갈등 해결의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11. 헤겔의 『안티고네』 해석은 특별히 역사철학적이다. 그는 이 작품이 그리스의 시대정신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고, 그리스 정신이 쇄락하면서 로마의 정신으로 이행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본다. 다분히 후행적 정당화로 보일 수 있겠지만, 이러한 해석이 시사하는 바도 크다. 이러한 헤겔의 해석은 두 가지 측면에서 두드러진다. 한편으로는 『안티고네』가 가족과 국가, 인간의 법과 신의 법, 남성과 여성처럼 그리스적 인륜을 지탱하면서도 화해하기 어려운 두 가지 원칙, 두 가지 법의 충돌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 하나는 인간의 법이자 왕의 명령이고, 남자의 원칙이고 국가의 원리라면, 다른 하나는 신의 법이자 천륜이고, 여자의 원칙이자 가족의 정신이다. 『안티고네』의 비극은 이 상반된 원리와 법이 구조적으로 대립하면서 완벽하게 파멸한다는 데 있다. 여기서는 대립을 매개할 수 있는 중재자도 없고, 반성과 성찰을 허용하는 전지적 관점도 없다. 다만 여기서는 각자의 행동을 규율하는 특수성의 원리와 법을 고수하려는 완고함만이 있다. 앞서 보았듯, 인간의 법과 신의 법은 각기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또 그만한 합리성도 있다. 마치 오늘 날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진영논리에 따른 대립과 같다. 『안티고네』의 비극은 이러한 대립을 해소하지 못한 채 그 두 세계가 동시에 몰락하는 경험을 보여준다.

12. 다른 한편으로 헤겔은 역사철학적 관점에서 그리스 사회가 몰락하고 로마 제국의 등장에 주목한다. 굳이 이것을 역사적인 팩트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 사회를 지배하는 특수성의 원리가 몰락하고 제국 로마에서 새로운 인간이 등장하고, 그들을 지배하는 새로운 국가 원리가 요구된다는 점이다. 안티고네와 크레온은 그리스 인륜 공동체를 규율하는 특수성의 원리에 지배를 받았다. 반면 로마의 제국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인간, 즉 법적 인격(Person)은 더 이상 특수성의 원리에 지배되지 않는 형식적 자아이다. 인격은 근대적 개인을 선취한 개념으로, 자신의 자립과 자유를 우선시하는 익명의 다수이고 원자화된 주체이기도 하다. 헤겔은 그리스의 폴리스가 해체되면서 등장한 새로운 로마적 제국을 ‘영혼 없는 공동체’, ‘죽은 정신’으로 묘사하는데, 이 공동체 속에서 절대 다수의 개인들은 원자들로 해체된다. 헤겔은 특별히 이 새로운 인간을 묘사하기 위해 ‘인격’(Person) 혹은 ‘법적 인격’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인격(Person)은 전체(신분 질서)의 규정을 받는 성격(caracter)과 다르게, 전체로부터 분리되고 고립된 개별자이자 개인이다. 헤겔은 단독자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인격을 ‘무수히 많은 점들’로 묘사하고, 그들을 횡적으로 엮는 유대는 인륜 공동체의 생동하는 정신이 아니라 타율적인 법적 강제와 형식적 평등의 원리이다.

13. 법에 의해 규율되는 사회 형태는 모든 사회 갈등과 분쟁을 보편적 법의 이념에 따라 해결하고자 한다. 근대의 법치국가에서 보듯, 법은 갈등을 매개하고 중재하는 최종 심급으로서 제 3자의 역할을 대신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추상적 형식으로서의 법은 내용상의 차별을 완벽하게 해결할 수 없다. 법치국가의 형식적 평등은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에 따른 빈부격차와 마찬가지로 실질적인 내용상의 불평등을 숨길 수 없다. 다시 말해 법적 상태에서 평등하게 인정되고 있는 인격권과 소유권은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원자화된 개체들의 법적인 형식적 인격성이 현실 속에서 자신의 권리를 확인하는 것이 곧 나의 것으로서의 소유인데, 소유에서의 불평등이 여전히 상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치의 한계이다.

내 것의 현실적 내용이나 규정은 (내 것이라는) 이 공허한 형식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그러한 내용에 (그것이 외형적인 소유물이건 아니면 정신이나 성격의 내면적인 빈부이건) 관심을 갖지도 않는다. 그 내용은 형식적 보편자와는 다른 그 자체의 권력에 속하는데, 이러한 권력은 우연적이고 자의적인 것이다. 때문에 법의 의식은 그 법이 현실적으로 유효한 곳에서조차 스스로의 완전한 비본질과 실재성의 상실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개인을 하나의 인격(Person)으로 호칭하는 것은 경멸을 표현하는 것이다.(『정신현상학』)

14. 법은 보편적 잣대의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형식적이기 때문에 내용의 우연성에 의해 좌우된다. 이러한 우연성은 권력과 부에서 특별히 많이 나타난다. 한국사회에 유별난 내로남불이나 전관예우, 유전 무죄와 무전 유죄와 같은 것들이 단적으로 그런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 보니 법이 정치의 도구가 되고 있는 현상도 또 다른 현실이다. 오늘 날 한국사회에서 법은 그 자체의 권력이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다. 사정이 그렇다면 법치는 전 시대의 연고와 같은 특수성의 원리에 비해 하등 달라진 것이 없지 않은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법치는 전시대의 연고를 대신할 수 있는 형식적 잣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그것의 형식성으로 인해 실질적 측면에서 한계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그것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15. 이제 마지막으로 한국사회와 관련해 합리적인 법의 지배와 그 한계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몇 가지 언급하고자 한다. 물론 이것이 우리 사회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정답이 될 수는 없지만, 최소한 방향은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최소한 선과 악,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법의 객관적 역할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점에서 법을 엄정하게 집행하고 판단할 수 있는 검찰과 사법부의 독립이 필수적이어야 한다. 둘째로,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갈등을 비판적이고 객관적으로 조명해야 할 언론이 진영논리의 한 축이 되어 선전과 선동의 역할을 한다는 데 있다. 이른바 조중동의 성격과 관련된 문제이지만, 진보적 성향의 언론들도 이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무엇보다 언론 본연의 역할 회복이 특히 중요하다. 동일한 선상이지만 극단적 선동을 일삼는 1인 미디어(유투브)나 종편에 대해 엄정한 책임을 묻는 것도 필요하다. 이들의 부정적 영향은 갈 수록 커지면서 사회 분열의 큰 원인이 되고 있다. 법치주의와 민주주의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불평등을 해소하고 문화적 다양성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 경제적 불평등은 사회를 극단적으로 대립시키는 원인이다. 사회 교양의 차원에서도 집단의 억압으로부터 개인의 다른 목소리를 보호하고 관용(tolerance)할 수 있는 성숙한 정신이 요구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훨씬 개인의 자유와 자율, 그리고 개성을 키울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한국 사회가 점점 더 다양성을 포용하는 쪽으로 변화할수록 현재와 같은 진영논리와 구조적 대립의 철옹성을 깰 수 있지 않을까? (2020.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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