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페이스북

강남순교수

< 트랜스젠더영화란 트랜스젠더도 인간이라는 급진적 주장>

==『한국트랜스젠더영화사』 추천사==

한 편의 글이 공적 공간에 등장하자마자, 그 글쓰기 행위란 '정치적'이다. 여기에서 '정치적'이란 매우 복합적인 의미이다. 한 사람의 글은 의도와 상관없이 다층적 권력구조에 개입하게 되고, 현실세계의 가치관, 해석적 틀, 관점, 또는 특정한 문제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 입장 등이 반영되기에 그 글을 읽는 사람은 그 글이 제시하는 가치관, 입장, 해석적 렌즈에 동의하거나 반대하게 된다. 여타의 글쓰기란 읽기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이다. 특히 '트랜스젠더'라는 이슈는 한국사회에서는 거의 금기시 되는 주제다. 이런 주제를 담은 책에 '추천사'를 쓰는 행위란 아마 이 글에 대한 '지지와 이해'보다는 '반대와 오해/오역'을 하는 편이 더 많을 모험적 행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천사를 썼고, 그 추천사를 여러 분과 나눈다. 이 글이 트랜스젠더를 포함한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조금이라도 풀어내는 작은 소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 책에는 변영주 영화감독의 추천사도 포함되어 있다.

==================

"트랜스젠더영화란 트랜스젠더도 인간이라는 급진적 주장"

<한국트랜스젠더영화사> 추천사를 부탁받았을 때, 나는 영화 전공자인 지인을 소개하면서 거절했었다. 우선 추천사 자체에 다소 비판적 관점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내가 영화에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서이다. 그런데 왜 거절했던 추천사 요청을 다시 쓰기로 마음을 바꾸었는가. '얼굴들'이 떠올랐다. 한국 사회에서 한 인간으로 존재하려고, 고통과 아픔으로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얼굴이 떠올랐다. 모든 인간 평등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제도 장치인 '포괄적 차별금지법'조차 제정되지 못한 2020년 한국 현실에서, 제 2등 인간 취급당하며 존재하는 성 소수자 얼굴들이 다가온 것이다. 그 얼굴들은 강의실에서 나와 함께 하는 성 소수자 얼굴들이고, 그들과 함께 서 있는 얼굴들이기도 하다. 내가 아는 얼굴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곳곳에 존재하는 얼굴들이기도 하다. 이 얼굴들을 떠올리며, 내가 처음에 거절했던 추천사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나의 추천사가 주민등록번호 기재 방식에서부터 차별받는 트랜스젠더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손잡고 서 있는 모든 얼굴의 존재론적 평등성에 대한 선언과 연대의 의미가 있기를 바란다.

◆ 트랜스젠더란 누구인가?: 개념의 필요성과 불가능성

트랜스젠더란 누구인가? 사전적 정의는 "트랜스젠더는 젠더 정체성이 태어날 때 지정된 생물학적 성(sex)과 본인이 느끼는 성이 다른 사람을 지칭한다"이다. 그런데 사전적 정의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트랜스젠더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 별로 없다. 물론 이러한 사전적 정의는 트랜스젠더 이해의 출발점으로서 중요하다. 그러나 단지 출발점일 뿐 도착점은 아니다. 많은 이들은 트랜스젠더 문제를 성적 지향과 연결한다. 그러나 트랜스 젠더의 성적 지향은 별개의 문제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많은 오해는 트랜스젠더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게 온전히 확립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트랜스젠더 일반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 사전적 정의를 넘어서지 않으면, 우리는 '트랜스젠더'의 사전적 틀에 실제 무수한 트랜스젠더의 다양한 모습을 일괄적으로 균질화해서 이해하는 데 멈추고 만다.

결국, 트랜스젠더를 식민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트랜스젠더를 모두 동질적인 존재로, 이색적인(exotic) 존재로, 또는 비정상적 존재로 보는 그 시각은 트랜스젠더의 삶을 한 인간으로 살아가지 못 하게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성 소수자를 지칭하는 'LGBT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라는 범주에 트랜스젠더가 있는 것도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LGB'는 성적 지향에 관한 것이지만, 'T(트랜스)'는 젠더 정체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집단적 범주를 지칭하는 라벨을 붙이면 그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다. 성적 지향 때문에 차별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그리고 사회·문화·종교·정치적 차별만이 아니라 생명의 위기를 겪으면서 오랜 성전환을 거치는 '트랜스젠더'로 규정되는 사람들-모든 이들은 다양성을 지닌 인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랜스젠더가 누구인가?"라는 정의는 "인간이란 누구인가?"처럼 개념을 규정할 '필요성'이 있다. 동시에 그 질문은 무수한 결이 있어서 지속해서 묻고, 발견하고, 창출해야 하는 질문이므로 개념 규정의 '불가능성'을 지닌다. 즉, 필요성과 불가능성이라는 패러독스를 가진다. 또한 트랜스여성의 경험과 트랜스남성의 경험이 같을 수 없다. 나아가서 직업, 교육 배경, 경제적 위치, 인종 등에 따라서 트랜스젠더라 해도 매우 다른 경험을 한다. 그래서 영화를 통해서든 이론 작업을 통해서든, 트랜스젠더 담론이나 삶에 대한 조명은 더욱 세밀해야 하고 심화해야 한다.

◆ 트랜스젠더의 사회·문화·정치적 경험

대부분의 트랜스젠더는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한다. 첫째, 그들은 '비합법적 존재'라는 것이다. 사회의 제도나, 사람들의 시선에서 그들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경험한다. 둘째, 트랜스젠더는 '비인간적 존재'라는 경험을 한다. 사람들이 트랜스젠더를 비규범적 존재, 인간에게서 벗어난 하부 주체로 생각하고 대한다는 것이다. 셋째, 일상적인 트랜스젠더 삶이 무시되는 경험을 한다. 트랜스젠더가 여타의 사람들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이러한 시각이 트랜스젠더가 한 인간으로서 일상을 살아가기 어렵게 한다. 넷째, 일상에서 다층적 폭력과 비극을 경험한다. 이러한 측면들은 트랜스젠더 일반이 경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트랜스젠더를 생각할 때는 더블 제스츄어 (double gesture)가 요청된다. 한편으로, 우리는 '트랜스젠더 일반 (transgender in general)'에 대하여 말해야 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트랜스젠더 일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즉, 사회 정치적 정황에서 우리는 트랜스젠더 일반을 논의해야 한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면 안 된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무한한 차이와 다양성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늘 인식해야 한다. '트랜스젠더'라는 범주에 한 사람을 집어넣고서 '모두 같다'라고 간주하는 그 지점에서 억압은 시작된다. 따라서 트랜스젠더가 경험하는 폭력과 비극은 개별적 존재로서 다양하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 트랜스젠더영화의 세 가지 과제

2019년에 <한국퀴어영화사>가 나왔고, 이제 <한국트랜스젠더영화사>가 나온다. '정상-비정상'이라는 이분법적 사유 방식과 사회 규범적 틀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담아내는 영화 보기는 우선 불편함과의 조우를 의미한다. 그런데 불편함과 마주하지 않고는 새로운 세계의 경험이 불가능하다. 그 불편함과 마주하는 경험으로 정상-비정상으로 고착된 절대화된 틀이 어떻게 억압적인 폭력으로 작동하는지를 비로소 인지할 수 있다. 불편함의 경험 없이 새로운 인식 확장은 불가능하다.

한국에서 트랜스젠더영화는 세 가지 중요한 과제가 있다. 첫째, 트랜스젠더 일반이 사회·문화· 정치적 정황에서 경험하는 폭력과 차별의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다. 둘째, 트랜스젠더 일반을 넘어, 모든 개개인이 개별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당연하지만 외면당하는 트랜스젠더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이다. 트랜스젠더로서의 집단 정체성은 사회 변화를 모색하는 정치화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이다. 셋째, 트랜스젠더 당사자만이 아니라, 그들의 삶과 연계된 다양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트랜스젠더의 가족들, 친구들, 트랜스젠더의 아이들, 직장 생활 등을 드러내면서 트랜스젠더를 보통의 인간으로 보여줘야 한다. 트랜스젠더가 경험하는 '특별한 경험'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경험하는 '보편적 경험'을 드러내야 하는 과제가 있다.

페미니스트 운동의 신조는 '페미니즘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급진적 주장'이다. 트랜스젠더에게도 이 신조를 적용해야 한다. 나는 ‘트랜스젠더영화란 트랜스젠더도 인간이라는 급진적 주장'이라고 본다. 영화는 그들이 겪는 사회 정치적 차별, 종교적 배제, 억압과 개별성을 가진 다양한 인간의 삶을 보여줄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런 영화로 '트랜스젠더도 인간'이라는 중요한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 한 편의 좋은 영화는 성 소수자에 대한 지독한 편견의 시선을 버리게 하고, 굳어진 마음을 열어 그들을 비로소 '인간'으로 보게 하는 강력한 설득의 언어를 품고 있다.

사람들은 묻는다. 왜 하필 트랜스젠더인가? 조금 불편해도 태어난 대로 살면 되지, 왜 그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서 다른 젠더로 전환하려고 하는가. 그런데 누구도, 하다못해 트랜스젠더 자신도, 이 질문에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으로 대답할 수 없다. 이 질문은 마치 "꽃은 왜 피는가?"라는 질문과 같기 때문이다. 생명세계는 '왜'를 알 수 없는 신비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람은 서로 다른 성적 지향과 젠더 정체성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왜?"가 아니라, 이 세계에 다양한 모습으로 생명체가 공존하며 살아가듯, 인간도 다양한 '존재 방식(mode of being)'을 지니고 태어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왜 트랜스젠더인가?"에 대한 답을, 독일의 시인 앙겔루스 셀레시우스(Angelus Silesius)의 시에서 찾는다.:

장미는 '왜'가 없다; 그것은 피어야 하기 때문에 피는 것일 뿐이다.

(The rose is without 'why'; it blooms simply because it blooms.)

이 시는 이성과 합리성 너머에 있는 생명의 신비로움을 상기시킨다. 트랜스젠더는 태어나면서 지정된 성별로 불편함, 불행감, 불만족을 심하게 느끼는 성별 불쾌감(gender dysphoria)을 대면한다. 용기 내어서 성전환하고 다층적 차별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젠더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왜 하필 트랜스젠더인가?"라는 질문을 멈추어야 한다.

"동성애에 찬성하는가?"라는 질문처럼 "왜 트랜스젠더인가"라는 질문은 성적 지향이나 트랜스젠더 삶이 마치 전적으로 개인적 취향이나 선택에 의한 것이라는 오류가 있는 전제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오류의 질문을 과감히 버리고, 다양한 존재 방식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존재 방식을 그대로 지지하고 연대하는 것-이것이 바로 "왜?"는 인간의 인지 세계 너머에 있지만, '피어야 하기 때문에 피는 장미'의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는 통로이다.

추천사를 쓰면서 대학 미디어 도서관에서 트랜스젠더를 다루는 다큐멘터리 영화들을 찾아보았다. 대학 도서관에서 언제나 온라인으로 볼 수 있는 트랜스젠더를 포함한 성 소수자에 관한 다큐멘터리 필름이 참으로 많았다. 트랜스젠더 당사자뿐만 아니라 트랜스 부모, 트랜스 부모의 아이들, 트랜스 청소년 등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다양한 주제를 담은 다큐멘터리 필름은 그들의 일상을 담아냈다. 그 다큐멘터리 필름을 만드는 이들이 오랜 시간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만들어낸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여남소노, 고학력자나 저학력자, 안정된 직업을 가진 사람이나 경제적 약자, 비장애인이나 장애인, 도시 또는 농촌에서 사는 이들 등 다양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다큐멘터리 필름은 그들 모두를 '트랜스젠더'라는 범주에만 집어넣어서 고정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전했다. 트랜스젠더 부부가 임신하고 병원에서 진단받는 과정뿐만 아니라, 실제로 쌍둥이 아이를 출산하는 모습, 그리고 그 아이들을 기르는 모습 등 오랜 시간을 들여서 세세한 일상의 삶을 담은 필름 등 다양한 다큐멘터리 필름을 보면서 내가 확인한 것은 한 가지이다. 그들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 영화에 등장하는 트랜스젠더의 삶이 내게 전하는 것은 '나는 인간이다'라는 단호하고 절실한 선언이다.

2014년에 나온 <현대 사랑: 트랜스젠더(Modern Love: Transgender)>라는 다큐멘터리 필름이 있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로 지내던 두 사람이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직장 생활도 하며 겉으로 보기에 평범한 결혼 생활을 하는 부부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남편이 성별 불편함을 겪고 결국, 트랜스 여성으로 성전환한다. 오랜 고통을 거치면서 그 부부는 남자와 여자라는 다른 성별이 아니라, 두 여성으로 함께 살아간다. 딸도 아버지가 여성으로 성전환한 사실을 받아들이고 가족 간의 관계를 지켜낸다. 남성과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여성과 여성으로 서로를 받아들이는 동반자 삶을 살아가는 한 어느 부부의 모습은 잔잔한 감동을 전해주었다. 트랜스 여성이 되기 이전과 이후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자, '춤출 때'라고 한다. 트랜스 여성이 된 남편이 시스 여성인 아내에게 묻는다.

"당신은 나와 춤출 때, 어떤 젠더를 보지? 남성이야 아니면 여성이야?"

부인이 답한다.

"내가 보는 것은 남성도 여성도 아닌 당신이야(I see you.)."

이 짧은 대답이 트랜스젠더를 바라보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지녀야 할 시선이다.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고정된 트랜스 여성 또는 트랜스 남성의 표지가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독특한 개성, 숨결, 개별성을 지닌 얼굴을 가진 한 사람, '너/그대/당신'으로 보는 것이다. 트랜스 여성 또는 트랜스 남성이 아니라, 그들을 한 인간인 '당신'으로 바라보는 시선과 제도가 뿌리내리는 세계를 나는 꿈꾼다.

<한국트랜스젠더영화사>는 이러한 낮 꿈의 씨앗을 우리에게 그리고 이 한국 사회에 뿌리는 영화 예술 담론이며 연대 운동이다. 이 책을 읽는 이들이 모든 존재가 존엄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평등하고 정의로운 세계를 향한 낮꿈꾸기 (daydreaming)를 시작하길 바란다. 인류의 역사는 이렇게 낮꿈꾸는 이들이 그 평등과 포용의 원을 확장해 왔기 때문이다.

2020년 9월

텍사스에서

강남순

=======

** 이 책은 텀블벅 구매 분들 그리고 독립서점에 우선 배포되고, 후에 11월 말쯤 온라인 서점에도 판매할 예정이라고 한다.

'페이스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요훈기자  (0) 2020.11.13
정철승  (0) 2020.11.13
지성용  (0) 2020.11.13
Chris Shin  (0) 2020.11.12
Edward Lee  (0) 2020.11.12
Edward Lee  (0) 2020.11.12
김민웅교수  (0) 2020.11.12
박지훈  (0) 2020.11.11
Edword Lee  (0) 2020.11.11
hyewon jin  (0) 2020.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