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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률

실패한 이념은 이념으로 불린다. 성공한 이념은 과학, 법칙, 인간본성... 아무튼 고정불변의 무엇으로 불린다. 어떤 논쟁에서 A가 B에게 '이념적이다'라는 딱지를 붙이는데 성공했다면, 그건 A가 과학이고 B가 이념이라는 뜻이 아니다. A가 당대에 더 성공적인 이념을 대변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공한 이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것이다. 이념으로 불리지 않는 것.

이 구속력은 엄청나게 강해서, 우리는 특정 이념에 기초해서 사고한다는 인식 자체를 못한다. 가장 성공한 이념은 물리학이 말하는 자연법칙처럼 사고의 출발을 규정해버린다. 예를 들면 우리는 소유권이 기본권에 속한다는 원칙을 거의 자연법칙처럼 느낀다. 소유권의 배타성이 흔들리면 경제학이 어떻게 흔들릴지 생각해 보자. 그리고 경제학이 흔들리면 우리가 믿는 현대사회의 기본원리 중에 살아남는게 얼마나 될지 생각해 보자.

그러나 역사를 보면 배타적 소유권이란 사회가 최근에 들어서야 구성한 지적 산물이다. 다시 말해 이념이다. 이 이념은 너무나 성공적이어서, 이걸 기반으로 하는 허다한 논변이 모두 과학으로 대접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부동산 정책 같은걸 두고 "시장원리를 무시하는 이념 정책"이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이 말은 사실 너무 성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이념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 대 이념, 원리 대 이념, 법칙 대 이념이라는 구도는 거의 대부분 '그 시대에 지배적 이념 대 그렇지 않은 이념'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념의 시대가 끝나고 과학과 합리의 시대가 와야 한다는 분들이 있다.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념과잉이 아니라 이념의 부족이 우리 시대의 문제다. 마치 역사가 최종적 답을 찾은양 이념의 모험을 시도하지 않는 태도가 우리 시대의 병폐 대부분을 닣았다고 여긴다.

이를테면 시장이 자기조정체제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려 본다. 이 아이디어는 아름답고 강력하다. 무엇보다도 지적으로 완결된 체제를 제안하므로 이념으로써 탄탄하다. 우리 시대가 과학이나 법칙이라고 부르는 원리들 대부분은 이 이념에서 파생한다. 이 아이디어는 지배이념이다. 따라서 이념처럼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사람들은 좀 재수없는 문장을 쓰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F=ma나 E=mc2에 아무런 겸손도 느낄수 없는 것과 같다. 자연현상이 아니라 사회현상을 두고 이런 느낌을 내면 문장이 어쩔수없이 좀 재수없어진다.

이 지배이념에 대한 지적 정치적 도전이 거의 두세대 가까이 끊겼다. 2차대전 이후만 해도 전혀 그렇지 않았다. 소득세 상속세 최고세율이 90%에 육박해도 되는 거였고, 부자들에게 거의 몰수에 가까운 재산세를 걷어 전후복구에 쓰자는 아이디어도 국가의 정책이 됐다. 자기조정은 실패한 이념이었다. 1970년대 이후 화려하게 부활했지만.

시장이라는 자기조정체제가 최종심급인 세상이라면, 진보주의자들이 무엇을 하든 지배이념에 댓글을 다는 이상으로 나아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배이념은 사고의 틀을 규정하므로 단기적으로 우회하거나 얼버무릴수는 있어도 장기적으로 없는셈 칠수는 없다. 하지만 진보파 정치가들 대부분은 지배이념에 댓글을 다는 정도로 스스로 뿌듯해하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 시대의 과제인 불평등은 지배이념의 부수적인 효과가 아니라 지배이념 그 자체의 결과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건 지배이념에 댓글 다는 정도로는 해결할 수 없다. 이념과잉이 아니라 이념부족이 진정한 문제라는 건 이런 의미다.

소유권과 자기조정을 법칙이 아니라 하나의 이념으로 보자는 얘기는, 소유권을 철폐하는 소비에트 실험을 반복하자는 얘기로 들릴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 소유권을 상대화하는 방식은 몰수와 국유화 말고도 많다. 이를테면 소득세 누진증세, 혹은 재산에 대한 누진과세도 소유권을 상대화하는 프로젝트다. 기업 이사회 구성에 노동자나 공공의 대표를 포함시키는 것도 소유권을 상대화한다. 이런게 황당해 보여도 지구의 어느 곳에서는 제대로 작동한다. 사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문제는 우리 생각만큼 자명하지 않다. 몰수와 국유화는 유일한 대안이 아니다. 그것을 유일한 대안으로 볼 때, 선택지는 사실상 자기조정체제 하나만 남는다. 다시 말해, 몰수냐 시장이냐라는 양자택일의 질문이야말로 대안의 폭을 좁히는 지배이념의 힘을 보여준다.

하나 더. 소유권과 자기조정을 이념으로 본다고 해서, 이 아이디어의 아름다움과 위력을 내다버려야 하는 것도 아니다. 소유권은 여전히 중요하고, 자기조정은 사회의 구성원리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 다만 이것이 자연법칙처럼 최종심급으로 작동하지 못할 뿐이다. 이것은 마치, 양자역학이 정립된 후에도 뉴턴의 고전물리학이 우리가 사는 현실세게를 꽤 훌륭히 설명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정도 상대화만으로도 우리의 공적 토론은 몰라보게 달라질 것이다. 이 글이 제안하는 건 이런 온건한 상대화인데, 이것만으로도 우리의 공적 토론에서 엄청 급진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두세대에 걸친 이념부족은 이런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오늘, 어느 국회의원이 공무원 임금을 20% 덜어내서 재난지원금에 쓰자고 제안했다. 나쁜 아이디어다. 논객도 아니고 입법자가 던지기에는 너무 설익었다. 하지만 이 제안은, 코로나의 피해가 취약층과 '괜찮은 일자리'에 주는 충격이 전혀 다르다는 중요한 문제의식을 깔고 있다. 왜 위험은 불평등하게 배분되는가. 더 안전한 곳의 자원을 징발하여 더 위험한 이들에게 이전해야 하지 않는가. 이를테면, 사회적 거리두기로 자영업자들이 피해를 보는동안 임대료는 왜 그대로인가. 이 위험은 나눠들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려면 정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만약 이 질문이 유효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이런 의제가 결국에는 소유권의 신성불가침을 상대화한다는 점을 주목해 주시길 바란다. 나아가, 지배이념을 건드리지 않으려 들 때 정치의 공간이 얼마나 알량해지는지도 주목해 주시길 바란다.

'공무원 20%' 제안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위험에 덜 노출된 곳의 자원을 이전하자는 제안이고, 위험을 좀더 공평하게 배분하자는 제안이다. 나는 공무원 임금삭감도, 그 재원으로 지급하는 보편적 재난지원금도 동의하기 어렵다. 이 제안은 자원 이전의 출처와 이전하는 방식과 이전받는 대상이 전부 이상하다.

하지만 내가 더 문제라고 여기는 대목은 따로 있다. 소유권의 상대화 기획 일체를 곧바로 포퓰리즘이라거나 경알못이라거나, 아무튼 지배이념에 벗어난다는 이유로 '반과학' '반이성'으로 기각해버리는 어떤 태도다. 이것은 지배이념으로부터 너무나 간단히 결론으로 달려가는 것인데, 따라서 이념적이다. 나는 이 표현을 욕으로 쓰지 않지만(문제는 이념부족이라고!), 과학으로 보이는 바탕에 깔린 이념을 드러내는게 매우 중요하므로 이 표현을 고수하겠다.

지배이념을 건드리지 않고 댓글만 달려 들 때, 그러니까 자산과 소득의 재분배를 의제로 올리지 않을 때, 정치의 공간은 터무니없이 좁아진다. 이럴때 나오는 아이디어라고 해봐야 기껏해야 온정주의적 긴급구제를 벗어나기 어렵다. 코로나 위기에 우리 정치는 임대료 재협상은 의제로도 올리지 못하고(소유권은 불가침!) 착한건물주 캠페인만 깨작거렸다. 그리고 정치의 공간이 이념의 각축장이 되지 못하고 지배이념의 자장 안으로 쪼그라들면, 이제 그 정치에서 대변되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른 출구를 찾아 나선다. 그게 정체성 정치고, 그게 포퓰리즘이다. 두세대동안 지배이념에 도전하지 못한 결과는 지구를 뒤덮은 정체성 정치의 물결이다.

'공무원 20%' 제안은 지지하기 어려우나, 그럼에도불구하고 정치의 본령에 속하는 질문을 깔고 있다. 더 중요하게는, 사실은 이념이면서도 과학이나 법칙으로 인정받는데 성공한 지배이념의 존재를 얼떨결에 폭로한다. 더욱이 이 해프닝은, 지배이념에 도전하는 어떤 시도(사실 해당 국회의원은 그런 성향으로 보기도 어렵다)가 얼마나 '이념적'이고 '비합리적'으로 취급받기 쉬운지도 보여준다. 지배이념에 도전하는 일은 결기와 기량을 동시에 요구한다. 정치가가 이념을 가진다는 건 이런 어려운 요구에 답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너무나 어렵고 위험하기 때문에 정치가들은 지배이념의 자장 안에서 댓글을 다는 '합리적 선택'으로 미끄러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배이념에 도전하는 정치가들을 덜 위험하게 보호해줘야 한다. 따라서 지배이념으로부터 곧바로 '자명한' 결론으로 달려가는 논변, 정치가들을 가장 위축되게 하는 그 논변은 실상 전적으로 이념적이라는 걸 늘 강조할 필요가 있다.

오늘 일은 거의 의미없이 지나갈 해프닝이겠으나, 내게는 꽤 흥미로운 스파크를 만들어낸 해프닝이라 주저리주저리 메모해둔다. 많이들 눈치채셨겠지만, 이 글은 피케티의 신작 <자본과 이데올로기>의 기본 아이디어에 표절에 가깝게 기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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