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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가르치는것과 나눔을 생각하며...

남들을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챙피한 일인지 나는 안다.

내가 남을 가르친다는 것이 부담스러운 일이 아닌가?

아무 생각이 없이 타인보다 우월의식에 사로 잡힌 인간이라면 더 가관이다.

어쩌면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인간일수록 더 가르치고 지도하려는 모습은 애처롭다.

왜 그럴까?자신을 모르면 모를수록 세상에 의지한다.

가르친다는 것은 세상을 말하려 하는것이다.

세상의 생명주기는 짧다.

세상에 가르침은 기능적 사고를 상대에게 전하는 과정이다.

착각에 빠지기 시작하면 인생도 논하기 시작한다.

세상을 논하는 자는 세상의 기술이 인생에 기술과 똑같이 생각하는 모양이다.

인생과 세상은 같지 않다.

세상을 의지하던 자가 인생을 실패하는 이유는 인생을 배우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세상을 얻으면 인생을 성공한 듯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의 판단으로 세상을 얻은자가 인생에 성공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조물주는 모두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을 택한 자는 인생을 택하지 않는다.

세상을 택한 자는 사랑을 구하지 않는다.

가르친다는 것은 이렇게 잘못된 길로 빠진다.

타인을 가르친다는 것은 도전이다.

가르친다는 것은 나눔이다.

본래 잠자코 있어야 하는곳에는 말하지 말아야 하는자들이 날뛴다.

탁류와 오염된 폐수속에 나에 던지다는 것은 나도 폐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혼자만의 정진으로 스스로 나아졌다는 것은 기분좋은 소식이다.

불교에서 도를 구하는 자들은 타인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다.(소승불교)

생각하건데 사람들은 세상에 기술은 배울지언정 인생은 배우지 않는다.

배우지 않는자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은 때로 교만이라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무익한 일이 아니런가?

모두는 아니어도 어느 한 사람에게는 평생에 참된길을 찾아주는 계기도 된다.

가르침이라는 것은 이런 한 사람을 위해 투자하는 과정이 아닐까?

수천 수만의 껍데기를 바라보고 사는 삶보다 한 사람에 모습속에 나를 보는것이다.

대부분이 사랑을 하고 살지 않는다.

모두가 본능으로 살다가 떠나는 슬픈 돼지이다.

고해의 바다도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곳에서 철저하게 갇혀사는 돼지가 아닌가?

세상이라는 헛된 망상을 움켜지고 가르침이란 아에 집착이 고소를 만든다.

가르침도 나눔도 모두가 헛됨을 안다.

가르침이 모두에게 기픔과 평화를 찾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나 하나만의 추구는 오류를 범하고 문제를 발생 시킨다.

더불어 살아감은 나와 같이 하고자 하는 인격과의 교류이다.

가르침과 나눔은 같은것이 아니다.

참된 가르침은 행동으로 말하는 것이다.

나눔으로 가르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