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 종족주의’론자들의 역사부정과 진실, 정의의 문제

역사 2020. 9. 27. 19:30

‘반일 종족주의’론자들의 역사부정과 진실, 정의의 문제

조시현 연구위원


이 글은 2019년 9월 25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일본군‘위안부’연구회가 공동 주최한 <<반일종족주의> 긴급진단 ­‘역사부정’을 논박한다> 토론회에서 발표한 토론문을 약간 수정한 것이다.


 

1. <반일 종족주의>에는 역사도 없고 인간에 대한 존중도 없다

이영훈 등이 낸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은 주류적 역사해석에 대한 도발, 상식의 해체, 단언적 서술 등을 통해 명쾌하고 매력적이라는 인상과 느낌을 주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모양이다.
현재 한국의 정치지형 속에서 일정한 지지를 얻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 대부분은 그들이 약속한 실증이 아니라 불합리한 추론(non sequitur)과 논리적 비약으로 점철되어 있다. 겉으로는 전문서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학술적 뒷받침이 없는 ‘가짜’ 학문에 불과하다. 결국 대중을 겨냥한 또 하나의 역사를 부정하는 선동에 그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들의 주장 가운데 상당 부분은 강제동원과 전시 성노예로서의 ‘위안부’의 부정에 할애되어 있다. 이들은 피해자의 증언을 모두 거짓말로 등치시키고 예외에 속할 일부 사례를 들어 전체의 것으로 일반화하는 오류 등을 범하고 있다. 또한 구술이 역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물론 피해자의 관점과 그들의 인권에 대한 어떠한 고려도 없다. 이 책은 피해자들에게 가해진 범죄를 역사적으로 규명하고 알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은폐하고 용인하는 반역사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이들의 주장은 “선진국”이라는 가치를 설정한 것 말고는 다른 모든 가치들을 부정하는 반윤리적 성격을 가진다. 이는 침략전쟁의 죄과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일본정부의 태도와 맞닿아 있다. 이러한 책임의 부정은 법과 정의에 기반을 두고 발전하여온 문명 자체를 부정하려는 시도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강제동원에 관한 진실을 두고 “조총련계 학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태연히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들은 공산주의와의 대결이 낳은 “빨갱이” 망령과 냉전적 사고에 여전히 사로잡혀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들과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절멸의 대상인 적으로 설정하면서 역사전쟁을 운운하고 있다.
역사란 마치 각자의 진영 속에서 진실이라곤 끼어들 틈이 없는 오직 이기기 위한 전략과 전술의 플레이라는 인식과 잘못된 지난날이 반복되건 말건 상관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 같아 섬뜩하기까지 하다. 이들이 구성하는 역사는 한마디로 데리다가 말하듯 “우리와 더이상 같이 있지 않은 사람들이나 앞으로 올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 없는 역사”라고 할 것이다(Specters of Marx(마르크스의 유령들), xviii).

2. <반일 종족주의>는 식민지 범죄에 대한 은폐이자 역사범죄이다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의 무리한 주장의 기반이 어딘지도 주목된다. 이들의 주장은 특히 2012년에 나온 강제동원에 관한 대법원 판결을 뒤집으려고 했던 사법적폐 세력의 주장과 판박이다. 대법원은 최종적으로 2018년 10월 30일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하여 일본의 가해기업인 신일본제철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으로서 위자료를 지급할 것을 명하였다. 일제의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고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인권에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일본정부는 즉각 이 판결에 반발하였고 한일 간의 갈등이 계속 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반일 종족주의>란 책이 나왔고 대법원의 판단과는 동떨어진 주장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대법원 판결이 청구권협정에 위배된 것이라며 판결을 무력화하려는 일본정부의 주장과 닮아있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의 저자들이야말로 “친일 종족주의자”라는 비난도 나오고 있다. 이 책은 기득권을 지켜보고자 하는 세력의 매니페스토(manifesto)임과 동시에 피해자들의 삶에 공감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슬픈 인생에서 나온 피해자들에 대한 혐오와 증오 발언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반일 종족주의>란 책을 학문이나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러한 역사부정 문제에 대하여 전 세계적인 대응노력이 주목된다. 유대인에게 자행된 홀로코스트나 나치범죄는 물론이고 아르메니아 학살과 같은 제노사이드나 반인도적 범죄를 정당화하려는 온갖 시도에 맞서 세계 곳곳에서 형사입법과 처벌이 이루어지고 있다. 식민지배 시기 동안 있었던 학살, 수탈 등 식민지범죄에 대한 관심과 탈식민주의 요구는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해도 오히려 커가고 있다. 한국에서도 각종 과거사정리 작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한계도 많이 보이고 있다.
대일 과거사문제 역시 단박에 청산되거나 정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인권침해에 대하여 국제법상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한 죄가 적용되어 단죄한 적은 없었다. 이러한 중대한 범죄자가 처벌되지 않는 이른바 불처벌(impunity) 문제에 대한 고민과 불처벌의 현실 속에서 확산되는 역사부정의 움직임에 대한 대응 방안도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3. <반일 종족주의>에는 민족이 없다

이 책의 저자들은 한국사회의 이른바 주류적 역사서술과 피해자운동을 “반일 종족주의”라고 싸잡아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반일 종족주의”가 무슨 말인지 정의조차 하지 않는다. 이들에 따르면 이 말은 물질주의와 거짓말을 토템으로 하는 샤머니즘에 사로잡힌 “한국인의 정신문화”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20-21쪽). 이 샤머니즘의 집단이 바로 종족이며 이웃을 악의 종족으로 감각한다고 한다.
‘종족’(tribe 또는 ethnic group)이란 말을 현재와 “지난 60년간의 정신사”에 대한 설명을 위해 쓰고 있는 모양이지만 하나의 분석개념으로서 갖추어야할 기초적인 엄밀함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이름붙이기를 통하여 분석 단위로서 ‘민족’이란 개념을 비하하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들이 구체적으로 이러한 호명의 근거로 들고 있는 것 역시 민족이란 집단 현상을 도외시한 원자론적 서사와 감상의 나열이 그치고 있다.
이렇게 민족주의와 종족주의의 차이를 말하지도 못하는 반일 종족주의론자들은 일제 강점이전의 조선이 갖는 국가성과 근대지향을 부정하려는 기획을 드러낸다. 국가 또는 민족이라는 양가적 의미를 가지는 ‘네이션(nation)’으로서 조선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조선과 현대 한국의 네이션을 종족으로 대체하는 반역사적 태도를 통해 그들이 비판하고자 하는 주류적 역사인식을 뒤틀고 있다. 하지만 이 땅에도 서구에서 만들어진 보편적인 범주로서 네이션은 현실로서 있었고 이 개념은 오늘날까지도 민족과 국가를 형성하며 부단하게 펼쳐지고 있으며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 유용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실증의 근거로 제시하는 문서나 수치들은 바로 식민지배의 정당화라는 틀 속에서 작성된 것이라는 사료비판도 없다. 결국 이들은 문서작성자의 세계관에 동조한 나머지 일제의 식민지배는 나쁘지는 않았다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들이야말로 곧 일제의 통치를 미화하려했던 식민사관의 후예라고 할 만하다.

4. <반일 종족주의>에는 일제의 제국주의/식민주의에 대한 비판도 없다

이 책은 또한 제국주의 또는 식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비판이 없이 마치 강제동원과 ‘위안부’의 역사를 신화인양 부정하는데 골몰하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 이라는 책에서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를 비판하며 인종주의와 결부된 “종족적 민족주의”를 말한 바 있다. 이들이 한국사회를 비판하며 제시한 종족주의라는 말은 오히려 제국주의 일본의 민족주의 비판에 걸맞다. 반일 종족주의를 말하기에 앞서 일제의 파시즘에 대한 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책은 일제에 의한 “주권강탈”(42쪽)을 말하긴 한다. 그러나 식민지 통치시스템이 무엇이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일제는 조선을 ‘병합’하여 일본의 일부, 즉 자기나라로 만들었지만 식민지로 통치하였다는 모순은 해명되지 않는다. 일제의 통치가 잘된 일이었다는 인상을 독자들에게 심어주기에 바쁘다. 명색은 한일병합이라고 떠들었지만 현실은 식민지배를 상징하는 총독에 의한 통치였다는 점, 조선총독은


역사란 마치 각자의 진영 속에서 진실이라곤 끼어들 틈이 없는 오직 이기기 위한 전략과 전술의 플레이
라는 인식과 잘못된 지난날이 반복되건 말건 상관없다는 식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 같아 섬칫하기까지 하
다. 이들이 구성하는 역사는 한마디로 데리다가 말하듯 “우리와 더 이상 같이 있지 않은 사람들이나 앞
으로 올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 없는 역사”라고 할 것이다


 

천황 이외에 어떠한 법적 통제를 받지 않았고 군대에 의해서만 지배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다는 점, 식민지 조선에 실시한 법이라는 것은 천황제 아래 삼권을 가진 총독의 의사에 좌우되는 전제적인 것이었고, 그 마저도 일본 내지의 법과 별개의 이원적 체계로서 관료체제를 통제하지도 못했으며 오로지 식민통치의 편의를 위한 것으로 주민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채 종주국의 이익에 철저하게 봉사하는 법이었다는 점, 일제의 식민지배에 법이 어떤 역할을 했다고 하기보다는 법은 통치술의 하나에 불과했다는 점, 이러한 법 현실은 언제나 정의의 공백을 낳았고 오늘날까지 정의를 갈구하는 피해자들의 외침으로 현재화되고 있다는 점, 병합은 결국 영토의 통합 즉 일제의 영토 확장이었지 국민간의 통합이나 EU식 지역통합이 아니라 원천적으로 조직적인 민족차별을 낳고 끝내 죽음의 강제동원으로 주민들을 내몰았다는 점, 병합과 식민통치 방식 사이의 모순은 결국 민족자결의 요구로 분출할 수밖에 없다는 점 등에 대한 어떠한 이해도 보이지 않는다.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해방’이라는 것은 민족과는 무관한 일이 되고 ‘독립전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국권회복을 말할 여지가 없이 1948년에 건국했다는 스토리와 연결된다. 이는 바로 한일국교정상화 과정에서 보여주고 지금도 일본의 우익이 견지하고 있는 역사관, 즉 일제의 패전으로 한국이 분리독립하게 되었다는 역사서술의 한국판이다.

5. 청구권문제와 강제동원문제는 끝난 게 아니다

한일 청구권문제와 관련하여 주익종은 특히 “애당초 한국 측이 청구할 게 별로 없었”다와 “한일협정으로 일체의 청구권이 완전히 정리되었”다를 “팩트”라고 주장한다(115쪽). 그가 얘기하는 팩트라는 것이 사실 또는 진실의 의미라고 한다면 이 주장들은 다 사실이 아니다. 먼저 “별로” 없었는지 있었는지는 어떤 판단 기준이 없이는 말할 수 없는 명제이다. 별로였는지는 어떤 일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의 사실 여부 또는 진위문제가 아닌 판단과 의견의 문제이다. 진실은 청구할 것이 여러 가지 있었다는 것, 별로 없었는지 여부에 대해 정확한 산정을 거친 끝에 3억불 해당의 무상공여가 된 것도 아니라는 점, 그 가운데 ‘위안부’문제는 한일회담에서 거론조차 안 되었고 따라서 “별로”인지 알 수도 없다는 점이라고 생각된다.
더욱이 “완전히” 끝난 것인지 여부 문제는 협정의 해석에 따라 판단되어야 하는 규범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끝났다’는 것도 팩트만의 문제라고는 할 수 없다. 완전히 끝났는지에 대하여 여전히 한일 정부가 입장 대립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대립이 어떻게 풀려갈지 지켜봐야 아는 문제이다. 현재진행형의 얘기를 끝났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누구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인지 잘 따져볼 문제다.
현재 판결을 받긴 하였지만 위자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관련한 이들의 입장도 주목된다. 청구권협정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또한 청구권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이 언급하고 있는 ‘대일청구요강 8개 항목’에서 “피징용자의 미수금과 보상금”이 언급되긴 하였다. 그러나 과연 이들이 누구인지, 어떤 일을 당했는지, 보상금에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금이 포함되는지 여부 등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정해진 바가 없이 두 나라사이에 협정이 체결되었다.
따라서 피해자들은 협정이 맺어진 이후에도 자신들의 권리를 계속 주장해야하는 처지가 되었고 이들의 노력은 2018년의 대법원 판결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점들이야말로 강제동원문제에 관한 주요한 사실들이라고 할 수 있다. ‘완전히 끝났다’는 것은 어느 한 쪽의 협정 규정에 대한 해석이고 규범적 주장이지 단순한 팩트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해석에 상대방도 동의하거나 양쪽이 따라야하는 유권적인 해석이 나와야 정리될 문제인 것이다. ‘끝났다’는 논리는 피해자들에게 윽박지르며 가만히 있을 것을 강요하는 셈이다. 이 문제가 끝난 것으로 결론을 내려야한다는 주익종(또는 아베 식의)의 강박관념은 그로 하여금 “징용 노무자의 정신적 피해는 당초부터 청구하지 않기로 한 것”(126쪽)이라는 주장으로 이끈다.
그가 무엇으로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지는 책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만의 하나 그의 주장대로 청구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 하여도 법적으로는 그러한 사실에서 권리의 포기라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권리를 포기한다면 명확하게 포기한다는 의사표시가 있어야 한다. 국제법에는 외국에 대하여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외교적 보호제도가 있다. 이는 국가의 권리로서 이를 포기한다는 것은 국가이기를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징용노무자의 피해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다면 이는 당시 정부가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을 따름이고 나중의 정부가 피해자의 요구를 받아들여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다. 일본이 가해책임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은 피해자 개인을 떠나 어떤 국가와 어떤 세계에서 살 것인가 하는 문제로 모두에게 달려있다.

6. 식민배상문제도 남아있다

주익종은 또 “국제법, 국제관계에 식민지배 피해에 대한 배상 같은 건 없었습니다. 한국이 배상 받으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126쪽)라고 주장한다. 바꿔 말해 식민배상은 없었다, 즉 사실에 관한 서술을 하며 현실론을 전개하고 있다. 쉽게 쓰려다 보니 배상의 선례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 같지만 선례가 없었다고 하여 그에 관한 “국제법”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법이 있냐, 없냐의 문제는 사실문제 같아 보이지만 규범적 판단을 내포한 문제이기도 하다. 선례가 없었다고 법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해야 할 일은 선례를 만들어 법을 확인하는 일이다. 대법원의 판결은 이러한 맥락에서 규범 차원에서 해야 하는 일을 실천한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의 필자들이 일제하에서 재산권이 보장되었음의 근거로 드는 것이 조선민사령이다. 이는 일본의 민법을 총독의 명령에 의해 조선에 빌려 썼던 것인데 여기에서도 현재 한국의 민법처럼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을 인정하였음이 팩트이다. 이러한 손해배상문제를 다루는 것이 “식민지배 피해에 대한 배상”을 하는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배상문제를 다룰 법적 여지는 식민체제하에서도 있었던 것이지만 실현될 수 없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또한 일본의 패전이후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건 1965년 한일협정에서건 식민지배하에서의 배상문제가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만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없었”으니 지금도 할 수 없다는 논리가 서는 것은 아니다.2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은 거꾸로 식민배상문제가 처리되지 않았다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또한 청구권협정이 재산문제를 해결한 “최선의 합의”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통해 일본과의 과거사가 청산되었고 이게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127쪽). 그러나 오늘날 세계적인 조류는 오히려 식민지배와 식민지범죄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인정하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 말고도 이탈리아와 리비아, 영국과 케냐 및 인도,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독일과 나미비아, 프랑스와 알제리, 스페인과 멕시코, 카리브해 국가들과 구 종주국들 사이에 식민 지배 아래 발생한 각종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사죄와 배상요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일부 성과도 나오고 있다. 특히 2019년 3월 26일에는 유럽연합 차원에서 유럽의회는 “유럽의 식민주의에 의해 아프리카에서 자행된, 과거는 물론 지금도 계속되는 부정의와 인도에 반한 범죄의 역사를 유럽연합 기관들과 회원국들이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기념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를 통과 시키기도 했다. 청구권협정의 진실은 협정으로 전쟁배상도 식민배상도 한 것이 아니라는 데에있다.


2 116쪽의 표에서는 대일 강화조약 제14조의 내용을 (a) 일본인 재산몰수와 연합국의 추가배상 협상에 관한 권리와 (b) 연합국과 그 국민의 청구권 포기로 요약하고 있는데 제14조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을 빠뜨리고 있다. 즉 제14조는 첫머리에 “일본이 연합국에게 전쟁 중에 일본에 의해 야기된 손해와 고통에 대하여 배상금(reparations)을 지불하여야 한다는 것을 승인한다”고 하여 명확하게 일본의 전쟁배상 책임원칙을 확인하고 있다. 청구권협정에는 이와 유사한 어떤 표현도 쓰여 있지 않고 따라서 배상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없다.


 

 

식민지하의 범죄와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은 언급도 되지 않았다. 대법원 판결로 초점이된 강제동원문제는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해결되어야할 것이다.

 

 


국제법에는 외국에 대하여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외교적 보호제도가 있다. 이는 국가의 권리로서 이
를 포기한다는 것은 국가이기를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징용노무자의 피해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다면 이는 당시 정부가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을 따름이고 나중의 정부가 피해자의 요구를 받아들여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다. 일본이 가해책임을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은 피해자 개인을 떠나 어떤 국가와 어떤 세계에서 살 것인가 하는 문제로 모두에게 달려있다.


 

7. 맺으며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은 강제동원과 ‘위안부’문제와 같이 오늘의 행동을 결정짓는 데에 있어서 여러 복합적인 요소들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이 필요한 사안에 대하여 무엇이 팩트인가로 이슈를 단순화하면서 사실과 법의 문제를 뒤섞어놓고 그릇된 의견과 행동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아주 현실참여적인 책이기도 하다. 더욱이 이들은 한국의 최고 법원인 대법원의 판결에 대하여 또 다른 최종심급 역할을 자임한다. 판례에 대한 비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의 단정적이고 교조적인 주장에는 그들이 생각하는 법원리가 들어가 있으므로 그러한 법이해가 올바른지 검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태가 여기까지 온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과거사와 법 또는 정의와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닌지 묻게 된다. 법의 문제는 법이 어느 사건이나 시기에 작용했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배제되기도 했다는 점에서 팩트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법도 역사속에서 같이 흐르며 힘의 관계에서 자유롭지 않다. 어느 행위를 합법이라거나 불법으로 생각했다는 것도 팩트이다. 과거에 어떤 판단을 했다면 그것은 법적 의미를 가지는 팩트이지만 그렇다고 현재의 필요에 따른 법적 판단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데리다의 말을 다시 빌리면 언제나 이미 현재화될 가능성을 가진 법 또는 정의라는 유령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해 배회하고 있다. 과거의 법을 화석처럼 현재의 법과 단절된것으로 사유하지 않는 가운데 한일회담에서 그리고 청구권협정의 문구에서 배제된 이들의 희망을 쓰는 역사 서술을 기대해본다. (<월간 순국> 2020년 3월호)

부역언론의 ‘산파’, 두 사주(社主)의 민낯

역사 2020. 9. 25. 12:37

미리 보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시 │ 조선 동아 적폐언론 100년을 다시 본다(3)

부역언론의 ‘산파’, 두 사주(社主)의 민낯

최우현 학예실 주임연구원

 

민족문제연구소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창간 100년을 맞아 기획전을 마련했다. 영광과 오욕의 100년 가운데 ‘오욕’이 사라진 100년을 비판하기 위해 기획됐다. 원래 두 신문의 창간일에 맞춰 3월에 개막하고자 했으나 코로나 19 감염병 확산으로 박물관을 잠정 휴관함에 따라 전시를 8월로 연기했다. 민족사랑에 3회에 걸쳐 미리 전시회의 주요 내용과 자료를 소개한다.

 

1939년 12월,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하시 고이치로(三橋孝一郞)가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를 자기 관사로 불렀다. 조선일보의 경영에 관한 내용을 청취하고 총독부의 ‘언문신문’ 관리 의향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총독부는 당시 최고의 실세 중 하나였던 미하시와 방응모의 만남을 「언문신문통제에 관한 건(諺文新聞統制ニ關スル件)」이라는 극비문서로 자세히 기록했다. 이 문서에 ‘협의(協議)’로 정의된 둘의 만남은 이날부터 무려 10차에 걸쳐 이어졌다. 
12월 22일 첫 번째 만남에서 방응모는 먼저 이렇게 고백했다.

“신문사업을 경영한 지 6년여에 그 실비(失費)가 많아서 곤란함에 빠져 오히려 교육 기타 사회사업 등의 문화 사업으로 전환하기를 희망한다.”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자진’ 폐간하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미하시는 반색했다. 2차대전 발발 등으로 어수선한 정국을 ‘언론통폐합’을 통해 다잡으려 했던 조선총독부의 모략을 언론사 사주(社主)가 스스로 나서 도와주는 셈이었다. 미하시는 실제로도 이 같은 방응모의 제안이 고마웠던지 통제방침에 잘 응하면, 방응모의 희망에 대해서도 “상당한 고려를 할 수 있다”며 선심을 썼다. 이에 방응모 또한 “그 뜻이 크게 움직”였다고 문서는 적고 있다.
12월 24일 두 번째 만남, 이틀 전의 면담을 통해 조선총독부가 협상에 응할 여지가 있음을 포착한 방응모는 이날부터 본격적인 사업상의 조건을 조선총독부에 요구하기에 이른다. 당시 방응모가 총독부에 희망한 조건은 아래와 같다.

 


 

① 동아일보도 함께 처분될 것
② 본사 발행의 3종(조광·여성·소년) 출판물은 계속 간행될 수 있게 할 것
③ 폐간 당일까지 본 협의에 응하는 것에 대해서는 외부에 대해 극비에 부쳐질 것
④ 종업원의 취직·전직의 알선 및 수당 지급에 유감이 없게 할 것
⑤ 건물을 포괄 약 100만 원 정도로 양도하는 데 차질이 없게 할 것
⑥ 장래 교육 또는 사회사업 방면에 활동하고자 희망함에 대해 원조해 줄 것

 


 

정리하자면 경쟁 언론사를 제거하고, 조선일보의 바통을 이어받을 출판사업은 유지하며, 새 사업으로의 진출과, 총독부의 원조 보상금 등을 충분히 얻어내려 했던 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자기네들은 사업은 유지하면서 경쟁사는 제거해버리는, 치밀한 ‘이면공작’이다. 방응모는 총독부의 약속을 토대로 조선일보의 출판부를 따로 독립시켜 ‘주식회사 조광사’를 발족시킬 수 있었다(1940.4). 즉, 조선일보의 중요한 알맹이는 살아남은 것이다. 잡지 <조광>은 원색적 친일과 전쟁선동의 논조를 유지하며 한글 신문과 잡지가 폐간당한 상황에서도 태평양 전쟁 말기까지 살아남는다.
세 번째 만남인 12월 28일, 방응모는 마침내 자신의 요구사항이 대부분 반영된 각서를 조인한다. 폐간계 제출은 이 같은 협상이 일단락된 뒤 이뤄졌다. 조선일보의 폐간은 사실상 사주 방응모의 자발적 의지로 결정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와 방응모의 협상은 10차에 걸쳐 계속됐고 이어진 협상과정에서도 폐간에 저항 따윈 없었다. 그저 폐간의 형식을 만들고 각종 이권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확답을 받아내는데 진력했을 뿐이다.
한편, 조선총독부가 조선일보와 중요한 협상안들을 마무리한지 한 달여 지난 시점에서야 동아일보와 첫 협상이 시작됐다. 「언문신문통제에 관한 건」에 따르면 동아일보가 “(폐간에) 응하는 기색이 없”었다는 총독부 당국의 평가와 경무국장이 사장 백관수, 고문 송진우를 불러 ‘권설(勸說)’했다는 내용 등이 적시되어 있다. 조선일보와의 ‘협상’ 기록에 비해서는 대조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폐간’이라는 총독부의 극단적 조치를 대하는 두 신문사의 태도는 다소 달랐다. 그러나 두 신문은 이미 총독부 기관지와 다름없는 논조의 기사와 일본 동맹통신사로부터 제공받은 전쟁 보도 기사들로 지면을 도배하고 있었다. 이렇게 조선‧동아 두 언론사가 총독부의 언론통제 방침에 충실했음에도 1940년 언론통폐합의 칼날을 비켜가지 못했다. 전황이 복잡해지고 장기화되는 국면에서 총독부는 <매일신보>와 크게 다를 것 없는 두 한글신문의 활용가치를 더 이상 못 느꼈을지도 모른다

 

끝까지 돈, 돈, 돈 … 퇴직사원들은 절망으로

이런 경과를 통해 두 신문은 1940년 8월 11일자 석간을 끝으로 일제강점기 20년의 사사(社史)를 잠시 마감한다. 조동 100년사에 남긴 두 언론의 공백, 즉 ‘폐간기’는 해방 전까지 약 5년정도 지속된다.(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각각 1945년 11월 23일, 12월 1일에 복간을 선언했다)
물론 유력한 자본가였던 방응모와 김성수에게 ‘폐간’은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진정 타격을 받은 사람들은 20년간 실질적으로 신문사를 떠받치며 저널리즘의 현장에서 고생한 사원, 배달부들로 이들은 당장의 생계를 걱정해야 할 처지였다.
조선, 동아일보는 사원들에게 <매일신보>한테 받은 영업권 보상금에다 회사 차원에서 자금을 더 증액하여 퇴직금을 지급했다. 동아일보는 2년간의 봉급에 해당하는 퇴직금을, 조선일보는 1년간의 생활비를 지급하고 3년 이상 근무한 사원에게 법정퇴직금을 지급하기로 한다. 그러나 조선일보가 사원들에게 지급한 퇴직금의 실상은 참담했다. 불만이 쌓인 사원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고 이에 결국 조선총독부가 관련 사안을 진상조사하기에 이른다. 경기도경찰부가 경무국장 앞으로 작성한 보고서 「폐간 양언문지의 사원 퇴직금 지급상황에 관한 건(廢刊 兩諺文紙ノ社員退職金 支給狀況ニ關スル件)」에는 조선일보가 사원들에게 지급한 퇴직금 현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일보는 350명의 사원들에게 총 23만 2,891원을, 동아일보는 303명의 사원에게 37만 968원의 퇴직금을 지급했다. 일단 총액에서부터 현격한 차이가 발생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중에서도 퇴직금 지급율이 가장 저조한 계층은 배달원으로 조선일보는 배달원에게 ‘평균 6원’의 퇴직금을 지급했다. 동아일보가 배달원에게 평균 734원의 퇴직금을 지급한 것에 비추어 보면 122배의 차이가 발생했다. 사원, 준사원, 공장종사원에게 지급한 평균액 또한 그 차이가 뚜렷하다. 1,473원의 동아일보 평균 지급액에 비해 조선일보의 평균 지급액은 801원에 불과해 여기서도 2배 가까운 차이가 발생한다. 다만, 퇴직금의 최고 지급액은 조선일보가 9,617원으로 동아일보 7,614원에 비해 높았는데 이 9,617원의 최고액을 가져간 주인공은 공교롭게도 사장인 방응모였다.

 

 

조선일보의 퇴직금 문제를 조사한 경기도경찰부는 “조선일보사의 지급율은 전자(동아일보)에 대해 비교도 안될 만큼 소액”이며 “양사의 차이가 너무나도 심하여 조선일보사원의 불평은 무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어 조선일보 사원들이 “방응모에 면회를 구하여 하등의 구제책을 요구”했으나 방응모는“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야말로 사주의, 사주에 의한, 사주를 위한 퇴직금 행정이 펼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양사의 사주, 전쟁의 나팔수로 변신하다

신문이 폐간되고 사원들이 퇴직금 문제로 허덕이는 사이 김성수와 방응모 두 사주들 또한 분주했다. 바로 전쟁부역의 ‘나팔수’ 역할을 자임한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은 진작부터 다양한 친일단체에 이름을 올렸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등 전쟁협력 관변단체에 참여했으며 시국강좌, 기사, 방송 등을 통해 전쟁 선동의 일익을 담당해 왔던 것이다. 폐간 이후에도 이들의 활동들은 더욱 두드러진다.
특히 교육자를 자처했던 김성수의 학병지원강요 행적은 충격적이다. 김성수는 1943년 10월 조선에 학도지원병제가 실시되자 자신이 맡고 있던 보성전문학교의 지원율을 높이기 위해 각종 활동에 나섰다. 그는 자신이 교장을 맡고 있는 보성전문학교의 학병 지원 실적이 신통치 않자 직접 조회에 나서 학생들을 설득하는가 하면 교내에 조선군 논객 ‘에가미(江上守彦)’ 중좌를 초청하여 강연회를 열었다. 학병지원병 독려를 위한 교장회의, 좌담회에 참여하고 지원을 호소하는 글도 여럿 기고했다. 그 결과 보성전문은 학병지원을 강요하는 집회를 가장 많이 개최한 학교가 되어버렸다.

 

<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자 석간 1면에 실린 김성수의 대표적인 친일논설 ‘문약의 고질을 버리고 상무기풍 조장하라’(출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다른 학교 학생들에 비해 일제의 전시정책에 비협조적인 경향을 보인 보성전문 학생들에게 이 같은 ‘교장’ 김성수의 전쟁선동 행위는 상당한 혼돈을 주었다.
실제로 학병지원 마감시점인 11월 17일, 보성전문의 학병 지원율은 53.6%에 불과했다. 가장 많은 선전활동을 했음에도 학생들의 지원율이 저조하자 김성수는 “한명이라도 지원에서 빠지는 자에게는 원칙적으로 징용”되어야 한다는 모진 발언으로 학생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그는 학생들에게 희생과 죽음을 강요하면서 거부하는 학생들의 의지를 ‘문약(文弱)’이라며 폄훼하기도 했다.
한편, 방응모는 일본 육해군의 ‘응원단장’과 같은 역할을 자처했다. 그는 1933년에 이미 조선군사령부 애국부에 고사기관총(제16호) 구입비로 1600원을 헌납한 바 있다.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한 직후의 일이었다. 조선총독부와의 거래에 밝았던 방응모는 중일전쟁이 터지자 적극적인 전쟁부역 행위에 나섰다. 1937년부터 경성군사후원연맹, 경성부지원병후원회,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에 발기인, 이사 등으로 참여했으며 군수산업체인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감사역을 맡기도 했다. 일제의 진주만 기습을 찬양하는가 하면, “일억국민의 총궐기”를 부르짖으며 침략전쟁에 감정적으로도 동화된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조선, 동아일보는 사라졌지만 사주들의 친일행각은 폐간 뒤에도 계속됐다. 아니, 신문을 통한 친일행위가 사라진 만큼 더욱 열심히 부역에 매진한 듯도 보인다. 특히 방응모는 조선일보의 후신인<조광>을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전쟁을 찬양하고 조선인 청년들에게 징병을 권유하는 논설과 문예물로 채워 완전한 친일잡지로 거듭났다.

 

민족을 배반한 한 세기. 반성 없인 영광도 없다

2009년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양사의 사주 방응모와 김성수는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언론재벌이 된 그 후손들은 2010년 당당하게 국가를 상대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취소’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럼에도 방응모는 2012년에, 김성수 2018년에 반민족행위자로 최종 확정되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일제 부역행위에 대한 반성은커녕 민족의 수난기를 함께 한 역사를 부각하며 ‘민족지’로서의 미화를 창간 100년이 된 이 시점에도 거듭하고 있다.
이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역사퇴행적 행태들을 볼 때마다 나치 부역언론을 단죄했던 프랑스의 사례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는 나치에 부역한 언론인 개개인에 대한 숙청뿐만 아니라 언론사 자체에 대한 단죄도 강력하게 진행했다. 나치에 협력한 주류 언론은 모두 폐간되었으며 그들이 사용한 모든 시설과 공간 등 재산도 몰수하여 어려운 상황에서도 저항을 지속해온 〈콩바〉, 〈데팡스 드 라 프랑스〉 등 지하언론이 사용하도록 조치됐다.
‘어쩔 수 없었다’ 식의 변명을 일삼던 언론인들도 가차 없이 심판을 받았다. 한 예로 나치독일을 미화한 일간지 〈르마텡〉의 편집국장 로잔은 (조선, 동아의 사주들처럼) “압력에 못 이겨”라는 변명으로 일관했지만 프랑스 재판부는 “독일 선전상 괴벨스의 품에 결국 안겼다”고 질타하면서 로잔에게 20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프랑스 나치청산에 대해 천착해온 주섭일은 “이 같은 (청산)과정들이 프랑스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자유와 사회정의, 인권이 참되게 존중받는 민주국가 건설에 이정표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이렇듯 엄정했던 프랑스의 청산사례들과 우리 역사의 청산과제들을 비교해 볼 때면 ‘한발 늦었다’는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조선‧동아 100년을 맞은 지금 더욱 절실하게 언론개혁을 외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취지에서 조선‧동아100년 기획전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을 마련했다. 3회에 걸친 “조선 동아 적폐언론 100년을 다시 본다”의 연재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은 오는 8월 11일 열리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에 전시될 예정이다. 이번 기획전과 연계한 특강 “지금, 언론개혁을 말한다”도 함께 진행되니 회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 참고문헌
박용규,
「일제 말기(1937~1945)의 언론통제정책과 언론구조변동」, 한국언론학보, 2009
장신, 「일제말기 김성수의 친일 행적과 변호론 비판」,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009
주섭일,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 사회와연대, 2004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 1~3, 민족문제연구소, 2009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보유편>,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