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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 교수

< 진정한 힐링, 어떻게 가능한가 >

1. 내가 글을 쓰거나 강연을 할 때 오래전부터 사용하지 않고자 하는 개념들이 있다. 예를 들어서 힐링, 영성, 공동체와 같은 개념들이다. 이 개념들은 매우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독하게 왜곡되고 오용되고 있다. 이 개념들이 오용되고 왜곡되는 것의 공통점은 ‘낭만화’이다. 낭만화의 문제점은 그것이 어떤 경우라도, ‘어두운 측면 (dark side)’을 외면하거나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소위 낭만적 사랑은 아름다운 것만을 추구하고 찾지만, 이 현실세계에서 그 장밋빛 아름다움의 이면은 보지 않으려고 한다.

2. 결국 낭만적 사랑의 관계란 상대방이 지닌 한계, 단점/약점은 보지 않는 관계라는 점에서 현실 세계에서 어려움이 생기면 그 관계를 지속할 용기와 열정은 부재한 한계를 지닌다. 또한 ‘공동체’라는 개념을 생각해보자. ‘공동체’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그런데 그 공동체라는 개념을 소환하자마자 벌어지고 있는 것은, 포용과 배제의 선을 긋는 것이다.

3. 종교 공동체, 민족 공동체 등과 같은 ‘공동체’의 소환은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하나의 커다란 깃발 아래 모이게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깃발이 제시하는 범주에 속하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들의 배제를 자연스럽게 만든다. ‘포용과 배제의 정치학’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힐링’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다. 웬일인지 ‘힐링’은 ‘치유’라고 한국어로 번역하지 않고 종종 영어 발음 그대로 음역을 해서 사용하곤 한다. 번역해서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경우를 제외하고, 굳이 음역하여 사용하는 것은 그 개념을 신비화하고 낭만화하려는 시도가 될 때가 많다.

4. 힐링이 요청되는 상황, 즉 한 개인의 세계 속에 있는 균열, 상처들은 그 상처의 정체를 복합적으로 들여다보아야 비로소 그 상처에 제대로 대응하게 된다. 이 복잡한 현실 세계에서 한 개인에게 일어난 사건과 연결된 상처와 고통은 한 개인만의 일이 될 수 없다. 그렇기에 현대사회에 전개되고 있는 힐링 논의는 다층적 정의 문제들과 연결되어 있다. 본인이 의식하든 하지 못하든, 개인이 겪고 있는 깨어짐(brokenness)의 경험은 사적이고 개인적이기만 하지 않으며, 다양한 얼굴의 불의, 불평등, 배제, 폭력 등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5. 가정, 학교, 직장, 종교 단체, 친구와 동료 관계 등 다양한 관계들에서 받은 상처와 아픔이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다양한 가치관들의 상충과 권력의 불균형들에서 생긴다. 예를 들어서 성차별, 학력차별, 외모차별, 성적 지향에 의한 차별, 장애차별, 계층차별 등으로부터 상처와 고통을 받은 사람의 힐링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상처받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며 그 상처가 야기하게 된 이러한 불의와 정의 문제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6. 그렇기에 진정한 ‘힐링’이란 일시적으로 기본 좋게 하는 힐링에 관한 책을 읽거나, 또는 마음 치유 센터, 기도원, 영성 센터 등에 가서 소위 ‘멘토’로부터 좋은 말을 듣고, 명상한다고 해서 가능하지 않다. 단지 ‘힐링의 낭만화’가 일어날 뿐이다. 뭔가 기분이 좋아지고, 상처가 치유되는 것 같아서 일시적 ‘힐링’이 일어나는 것 같을 수는 있다. 그런데 자신에게 벌어진 일의 정체를 복합적으로 조명하는 과정이 생략된 힐링의 경험이란, 결국 순간의 아픔과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는 마약/마취제를 흡입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허위-힐링’의 상태로부터 자신의 현실세계로 돌아오면, 아무것도 바뀐 것은 없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이해, 자신의 고통과 아픔에 대한 복합적 이해가 결여된 채, 뭔가 ‘좋아졌다’고 생각하는 환상을 가질 뿐이다. 칼 맑스가 ‘종교란 사람들의 아편’이라고 한 정황이다.

7. 영어 표현으로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모든 것은 잘 될 거야 (everything is going to be alright)”라는 말이 그 진정성을 확보하려면, 자신의 정황에 대한 치열한 개입과 복합적인 분석적 조명의 과정을 거쳐서만이 가능하다. 문제들이 돌연히 사라져서 ‘잘 될 거야’가 아니다. 그 문제들의 정체를 자신이 인지하게 되고, 그 문제들에서 자신의 ‘피해자성’이 아니라 ‘변화의 주체자성’을 확보하게 될 때 비로서 ‘잘 될거야’라는 말이 진정성을 지니게 된다. 진정한 힐링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피해자성으로부터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변화의 주체자로 전이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힐링’이 시작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서점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는 힐링에 관한 책들, 다양한 수련센터, 기도원, 영성센터, 또는 명상센터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는 ‘힐링’센터들은 한 개인의 상처나 고통이 사실상 그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상호관계들, 사회정치적 구조들, 또는 종교적 왜곡에 의해서 야기된 것임을 보게 하지 않는다. 여기에 ‘힐링 유행’에 그 지독한 위험성이 있다.

8. 2005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세계 각국으로부터 모인 수백 명의 학자, NGO활동가 등이 모여서 10일 동안 이어졌던 국제회의에 발제자로 참석한 적이 있다. 그 모임의 주제의 화두는 “치유와 화해(Healing and Reconciliation)”였다. 정치, 종교, 환경 등의 세계에서 다층적 폭력이 난무하고, 그로 인해 평화가 깨어지고, 개인과 집단적 삶이 파괴되는 이 현실 세계에서 진정한 ‘힐링’이란 “정의 지향적 힐링(justice-oriented healing)’이 되어야 한다. 그러한 정의 지향적 힐링의 과정에서 진정한 ‘화해’ 역시 가능하게 된다. 나는 이 모임에서 “심층-정의-지향적 힐링과 화해 (deep-justice-oriented approach to healing and reconciliation)”라는 주제로 발제를 했다. ‘심층 정의’라는 개념은 많은 이들이 사용하는 정의 개념이 종종 매우 추상적이고 거시적 정의만을 다루는 오류를 넘어서고자 하기 위함이다. ‘정의’라는 개념은 고대로부터 철학자들이 사용해왔지만, 그러한 ‘거시정의 (macro-justice)’에서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정황과 연결된 ‘미시 정의(micro-justice)’가 결여될 때 또 다른 형태의 불의에 개입하게 된다.

9. 구체화한 불의와 정의문제, 배제와 차별문제, 그러한 세계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조명과 문제들에 대한 복합적 인지 없이 진정한 힐링은 불가능하다. 나는 그래서 나 자신은 물론 지속적인 ‘독학’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자신이 씨름하고 있는 문제들, 자신에게 고통과 아픔을 주는 문제들의 정체를 복합적으로 들여다보는 일은 자동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신의 문제라고 자신이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내게 아픔과 고통을 주는 것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기 위해서 우리는 다양한 통로를 통해서 ‘학습’해야 하기에 치열한 독학자로 살아야 한다. 진정한 힐링의 주체는 외적인 스승이나 멘토가 아니라, 오로지 ‘학습하는 나,’ ‘용기를 작동시키는 나’이다.

10. 나는 강연을 하거나 수업을 할 때, 힐링에 대하여 묻는 이들에게 내가 하는 ‘멘토링’이 있다: “소위 유명하다는 ‘시대의 스승/멘토’ 또는 베스트셀러라는 힐링 책을 거부하라. 그리고 자신이 자신의 우선적 멘토가 되라”는 것이다. 나의 고통과 아픔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내가 사는 관계망 속에 어떠한 차별과 배제의 문제가 있는가, 나의 고통 한가운데서 ‘피해자’로서만이 아닌 ‘변화의 주체자’로 나를 만들어가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러한 씨름과 학습 한 가운데서 비로소 진정한 ‘힐링’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나는 본다. 힐링이란 단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힐링이란 한 사람의 삶의 여정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결국 '진정한 힐링'이란 자신이 인내심과 용기를 가지고 자신에 대하여 알아가는 학습을 하면서, 꾸준히 일구어 내야 하는 '정원 가꾸기'와 같은 것이라고 나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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