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 전부터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의 문제는 정치적 민주화의 제도적 마무리라고 주장해왔다. 정치적 민주주의의 요체는 (1) 주권자가 정치권력을 선택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 외, (2)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정파적 발호를 억지하는 것에 있다.
'1987년 헌법체제' 수립 이후 (1)의 경우 한국의 주권자는 아무 두려움없이 자기가 원하는 대표자를 뽑고 있으며, 뽑힌 대표자를―대통령이건 국회의원이건―마음껏 비판하고 조롱하고 있다.
그런데 '1987년 헌법체제'는 (2)에 대해서는 철저한 제도적 준비를 하지 못하였다. 검찰과 언론은 권위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첨병이었다. 과거 수많은 공안사건에서 검찰의 수사와 기소, 그리고 독재자를 찬양하던 언론 사설을 떠올려 보라. 이랬던 검찰과 언론이 정치적 민주화 이후에는 달라졌을까?
OECD 최강의 권한을 가진 검찰은 법무장관의 인사권과 감찰권 외에는 아무 통제를 받지 않는 권력이기에, '선택적 수사'와 '선택적 기소'를 일삼고 있다(심지어 인사권도 검찰총장에게 달라고 택도 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검사비리에 대한 솜방망이 감찰과 수사 사례는 이미 여럿 보도된 바 있다.
언론은 OECD 최고 수준의 자유를 누리면서도, 사실확인의무를 방기하고 자신들이 반대하는 정치권력에 대한 저주와 매도에 몰입하면서 '사실상의 정치활동'을 매일 벌이고 있다. 자사 사주 비리에 대한 취재와 보도를 하였다고 들어본 적이 없다.
이상을 망각하고 한국 검찰과 언론을 "정의의 사도", "진실의 추구자"라고 믿으면서 그 행태를 '정부 감시'라고 마냥 옹호하는 것은 어리석고 위험하다.
한국 검찰과 언론은 모두 '감시자'를 자처한다. 그러나 로마 시인 유베날리스(Decimus Junius Juvenalis)의 말을 빌리자면, "그 감시자는 누가 감시할 것인가?" 시민이 할 수 있고, 법원도 역할할 수 있다. 그러나 부족하다.
공수처와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모두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두 제도가 도입되어야 '감시자에 대한 감시'는 첫 발을 내딛을 수 있다. 이 과제가 민생과 방역이라는 다른 사활적 과제와 병행되어 완수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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